브레히트 B. Brecht/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사극의 창시자, 브레히트의 비웃음

그리스도의 편지 2018. 9. 15. 19:52





서사극의 창시자, 브레히트의 비웃음
- 서사극에 이전한 형식을 발견하지 못하는 연극(독문)학자들에게 여전히 보내는 비웃음
 
 



타자기 앞에서 창작에 몰두하는 브레히트" (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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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것을 보여줄 수 있도록
난 다른 민족들과 다른 시대의 연극술을 검토하지.
몇 작품을 나는 번안했네, 아주 똑같이
각 기술을 점검하고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을
내 가슴에 새기며.
나는 영국인들을 통해 다양한 인물들과
유명한 귀족들의 표현력을 연구했지
세상이 크게 확장되도록 이들을 이용했네.
나는 도덕적 견해를 고수한 스페인인들
아름다운 감정 표현의 대가인 인도인들
그리고 가족들을 연기하는 중국인들
그리고 도시들에서 다양한 운명을 연구했다네.

(Lied des Stückeschreibers, 1935년, GBA 14, 29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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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시는 브레히트가 1935년 뉴욕의「어머니 Die Mutter」의 초연 (11월 19일)과 관련하여 지었다고 추정되며,  「극작가의 노래 Lied des Stückeschreibers」에서 그는 첫 희곡 작품에서부터 그 당시까지 시도했던 모든 연극작업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이 시 (詩)를 통해 1935년까지 말로우 Marlowe , 셰익스피어 연극에서 칼데론 Calderón, 인도 고전연극 그리고 중국의 元曲과 梅蘭芳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중국 연극을 경험한 모든 극작업의 경륜을 잘 나타내고 있다. 




뉴욕 "Civic Repertory Theatre"에서 "어머니" 공연 사진 (1935년 11월 19일) 


    특별히 브레히트의 아시아 연극과의 관계는 1850년부터 시작된 인도 고전극 번역에 이어서 중국과 일본 문학을 한창 독일 무대에 번역하던 당시의 아시아 문학 붐을 지켜본 청년 브레히트가 1922년 그의 메모지에다, “르네상스, 그것은 아시아 고전의 소생” 이라고 적고 있는 사실 하나로 충분하게 대변된다. 이 “아시아 붐”에 힘입어 브레히트 역시 아시아 문학, 연극 그리고 철학에 골고루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이와 관련해서 마이어 Hans Mayer는 자신의 『브레히트와 전통』이란 책에서, “초시간적인 부르조아 미학, 요리법적인 연극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그의 도전을 위한, 극동에서 증인과 동맹자를 구하려고 브레히트는 극동으로 원정을 했던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이 브레히트는 자신의 『서사극』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아시아극을 『서사극』의 모델 내지는 정형으로 삼고자 했다. 즉 인도극에서는 그리이스 비극에 버금갈만한 극구성의 선례를, 중국극이나 일본의 能演劇에서는 비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공연기법이나 연기술 등의 연극 기술적인 요소를 발견하여 자신의 『서사극』에 수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브레히트는 1938년 8월 3일자 작업일지에, "내 분야에서 내가 갱신자이기 때문에, 나를 형식주의자라고 거듭 강조하는 이들이 항상 있다. 그들은 나의 작업에서 옛 형식을 찾아내지 못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들이 새로운 어떤 형식을 발견하고는 이것이 내가 관심을 두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나는 다양한 시대에 속한 시, 소설, 희곡술 및 연극의 옛 형식을 연구했다. 그런데 그러한 형식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나는 그것을 곧 바로 포기했었다" (GBA 26, 315f.)고 그 당시 연극학자는 물론, 문학비평가와 연구자들에게 비웃음을 보내고 있다. 올해로 브레히트 120주년, 지난 8월 14일로 그가 죽은 지 62주기가 된다. 그런데, 브레히트의 이 비웃음은 과연 끝이 난 것일까?!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브레히트의 대가이자, 새전집 주편집자로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독일 칼스루에 대학 크높 교수조차도 인도와 연관된 “아름다운 감각의 거장인 인도인들을 연구했다”라는 싯귀를 해설하면서 단지 브레히트가 1914년 타고르의 시집 『정원사Der Gärtner』를 읽고 평을 쓴 사실과 1920년 타고르의 소설 『고향과 세상 Das Heim und die Welt』을 읽은 사실로만 해석함으로써, 이 싯귀를 인도 산스크리트 희곡 작품과의 관계가 아닌 타고르의 시와 소설로 제한" (GBA 14, 614) 하고 있으며, 예를들어 한국 연극학자들이 여전히, 브레히트가 남긴 일본 能演劇의 꼬리만을 잡고 감히 "브레히트와 동양연극" (이상면, 평민사)과 같은 거창한 책들을 계속 펴내는 비웃음꺼리를 자처하고 있다. 이 책은 내용상으로 오히려 "브레히트와 能演劇"이라고 제목을 붙였어야 훨씬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런데, 비록 브레히트 연구자들에게는 여전히 불명확한 주제일지는 모르겠으나, 브레히트 자신은 일찌기 스승인 포이터방어를 통해 인도 산스크리트극을 접했고, 그 이후 중국 원잡극 그리고 일본 노연극의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접했었다. 스테핀이 망명지로 가져온 산스크리트극 독어판, 2권은 중요한 후기 희곡들,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사천의 선인" 그리고 "코카서스의 백묵원"등을 창작하는데 지침서가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스테핀의 원고들을 전부 남겼지만, 이 두권의 책을 전망명지를 끌고 다녔고 유고 도서관에 남겼을 정도로 그에게는  "서사극을 위한 귀중한 교본"이었다. 물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서사극 이론을 발전시키고 정립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브레히트는 위의 인용 구절처럼 당대 연극학자나 문학이론가는 물론, 현재의 브레히트 연구자들에게 그는 무덤에서도 계속 비웃음을 보내고 있다. 위에 글에서 브레히트가 언급하듯이, 다양한 시대는 물론 "다양한 나라 연극의 옛 형식들"을 연구했고, 실제 무대공연과 연습을 통해 수없이 텍스트를 바꾸고 다시 썼다. 그러므로, 새전집 GBA에 인쇄된 작품만으로 어떤 형식을 발견하고 주장하는 일조차도, 브레히트의 비웃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서사극 형식의 뿌리를 학문적(연극사적, 문헌학적)으로 밝혀내지 못하고 브레히트가 구체적으로 남긴 흔적의 꼬리를 잡고 계속 연구를 거듭한다면, 브레히트에게 조롱받는 일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꼬리는 다름 아닌 1929/30년 일본 能 (Nô)연극의 한 작품인 『谷行 (Taniko)』를 가지고 번안했던 교훈극 『긍정하는 사람 Der Jasager』(1929/30)에서 처음으로 能劇의 희곡을 자료로 삼았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서사극의 뿌리를 찾는 점이다. 물론 그 작품만을 비교하고 분석한다면, 충분히 문헌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서사극의 형식과 기술을 일반화시킨다면, 엄청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브레히트는 이미 그 형식을 교육극 몇몇 작품에서만 제한해서 사용했고, 그의 말대로 "곧 바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런 브레히트의 비웃음에서 빠져 나올려고 몸부림치는 연극 전공 학도들이나, 브레히트 서사극을 전공하는 학도들에게 브레히트 코드가 브레히트 120주년 기념으로 내놓는 아래 콘텐츠를 꼭 한번 필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브레히트 비웃음 탈출 프로젝트




       

    

배경 음악은 Ennio Morricone의 "Friendship and Love"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