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B. Brecht/베르톨트 브레히트

비과학적으로 쓰여지는 '브레히트의 연인들'류의 글

그리스도의 편지 2018. 9. 12. 06:28





비과학적으로 쓰여지는 '브레히트의 연인들'류의 글
- IT에서 DT시대로 전환기에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으로 쓰는 찌라시성 글들
 
 
 


    미국 헐리우드로부터 시작된 'Me Too 캠페인'이 현재 국내에서도 다방면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 운동은 SNS상에서 '나도 피해자 me too'라며 자신이 겪은 성범죄를 고백하고 그 심각성을 알리는 캠페인이다. 여전히 남성위주의 사회인 국내에서 범죄를 알면서도 피해자보다는 가해자를 위해 사건자체를 덮기에 급급했던 그간 일들이 법조계, 문학계, 연극계, 예술계는 물론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사회전반으로 이 캠페인이 번져나가고 있다.   


    이런 경향에 편승해 사실과 진실에 기초를 둬야하는 학계 교수 내지 문학자들이 "브레히트와 연인들"이라는 주제를 또 다시 다루는 현상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물론, 이 주제는 브레히트 연구에서 이미 설득력을 잃은 한 책에다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책은 1994년 「국제 브레히트 학회 The International Brecht Society」 창립자이자 「The Brecht Yearbook」의 편집인이며 메릴랜드 대학 독일, 슬라브, 비교문학과 John Fuegi 교수가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에 출간했던 『브레히트와 친구들 (『Brecht and Company. Sex, Politics,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Drama. New York 1994』) (이하 BC라 약칭함), 『The Life and Lies of Bertolt Brecht. London 1994』란 브레히트 전기이다. 이에 근거를 두고 쓰여지는 대부분의 글들이 출간 이후 '과장과 왜곡이 심한 사실'로 인해 브레히트 학계에서 이미 설득력을 잃어버린 Feugi교수의 책에 근거를 삼고 있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아직도 브레히트의 전기(傳記)로 쓸만한 그 무엇이 있는가? 또 쓰여질 무엇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는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답으로 책이 출간되자마자 새로운 관심 (»The Times« 1994년 6월 24일, »Die Zeit«,「Vom argen B.B.」von W. Winkler, 1994년 8월 12일)과 조롱의 대상 (Jan Knopf: Sex for text. In: Konkret, Oktober 1994. S. 53-55, Klaus Völker: Ohne Scham, Ohne Charme. In: Theater heute, November 1994. 52-55)이 되었다.


   워드프로세스로 논문이나 글을 쓰는 인문학자들이 "문학 연구에도 "컴퓨터의 기억 저장력의 힘'을 빌어 대량 텍스트 (Data)의 처리와 분석을 통해야 한다"는 취지로 1988년부터 "브레히트 컴퓨터 인덱스 2000" (BCI2000)을 한창 작업하던 중이었고 브레히트 연구에 몰두하던 필자는 이 책이 출판됨과 동시에 "청교도적 안목으로 쓴 외설적인 브레히트 전기 - John Fuegi,『Brecht & Co.』 (New York 1994)"란 제목으로 비판적 서평을 쓴 적이 있다. 그 이후, 브레히트 문학의 작품성보다는 사생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유혹된 보수적 성향의 문학자들은 Feugi의 글을 아무런 비판없이 앵무새처럼 되뇌이거나 확대 재생산하는 각종 시도들이 아직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브레히트 연구자나 관련 글을 쓰는 필자들이 이런 오해나 유혹을 피할 수 있도록 "쉽게 쓴 브레히트"란 카테고리 아래 "이해(오해)하기 어려운(쉬운) 브레히트 사랑"이란 글들을 계속 연재했었다. 애석하게도 Fuegi 출판 이후 25년 가까이 된 오늘에도 브레히트 관련 연구자들에게 브레히트 여자 내지 사생활 문제는 여전히 '매혹-유혹'적인 주제로서 '찌라시성 글'을 양산할 함정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재 국내 온라인 상에 떠도는 이런 글들을 살펴보기 전에, 독일 통일 이후 일부 브레히트 학자들이 "또 다른 브레히트"를  찾아나섰던 경향을 우선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통일이후, 브레히트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먼저 1988년 브레히트 90회 생일을 기념하여 주르캄프 Suhrkamp와 아우프바우 Aufbau 출판사가 공동으로 새전집(GBA) 출판을 기획했다. 이를 계기로 브레히트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가 했는데, 이내 동‧서독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브레히트 문학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그 중심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소위 "또 다른 브레히트"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국제 브레히트 학회』의 주최하에 『다른 브레히트 Der andere Brecht』란 주제로 1991년 12월 8일에서 13일까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개최된 『브레히트 심포지움』이다. 이 심포지움 이후로 『국제 브레히트 학회』에서는 계속해 『Der andere Brecht I, Brecht Yearbook 17』(1992), 『Der andere Brecht II, Brecht Yearbook 18)』(1993), 『Focus: Margarete Steffin, Brecht Yearbook 19』(1994)을 발행했고, 『Brecht: Then and Now, Brecht Yearbook 20』(1995)을 내놓았다. 


    이들 『Brecht-Yearbook』에 실린 많은 논문들 중에 주목할 만한 사실은 브레히트의 "사생활과 여자 문제"에 대한 언급들이 많아졌으며, 또 이것을 바탕으로 작가 브레히트의 작품세계를 분석하려고 시도한 점이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의 움직임으로 소위 『브레히트 쩬트룸 Brecht Zentrum』에 의해 1992년 편집된 「브레히트 이후 Nach Brecht, Ein Almanach 1992」(Berlin 1992)을 들 수 있다. 어찌했던 이러한 측면에서 이제까지의 연구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부정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다른 브레히트 찾기 움직임"은 Fuegi가 내놓은 책 「Brecht and Co.」를 기점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Grove Press (New York) 에서 발행된 책 표지


    저자 Fuegi는 BC에서 자신의 주장에 대해 설득력을 더하고 이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킬 새로운 수많은 근거들을 제시했는데, 이 "새로운 근거"는 자신이 자료로 삼았다는 소위 KGB와 FBI의 자료들이다. 그런데, 이 자료들은 한 인간의 인격을 보호‧존중할 목적으로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는 보기 어렵고 거대한 비밀경찰 조직에서 수집한 한 개인의 사적인 일들을 사찰한 탐색문서 Schnüffeldokumente이다. 하지만, Fuegi는 이런 문서들을 BC에서 이제까지의 학문적 연구 결과들보다도 더 신뢰한 나머지 가짜 정보를 계속 양산하는 결론을 낳고 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Fuegi는 BC에서 사회주의 작가로 알려진 브레히트를 "개인과 자본의 착취자, 여성 파괴자, 나아가서 거짓말쟁이 작가"로 비난하고 있다. 브레히트를 「사기꾼」, 연인이자 공동작업 했던 여인들 - 하우프트만, E. Hauptmann, 스테핀 M. Steffin, 베를라우 R. Berlau - 의 정조와 문학적인 재능을 유린하고 도둑질한 「파렴치」로 비판하기 위해 이런 자료를 너무 신뢰한 나머지 학자로서 자신의 이성적 판단과 학문적 소양을 의심받음과 동시에 설득력을 잃어 버렸다. 왜냐하면, 브레히트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독자들이면 누구나 의심할 정도로 작가의 작품이나 이론 자체 보다도 지극히 지엽적인 문제로 이 책은 치우치고 있고 외설적인 기술들을 나열하기에 지면을 너무 낭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 망명중 (1939년 여름) Brecht와 Weigel


    지금까지 살펴본 Fuegi교수 BC의 기본 논조에 따라, 국내에서 더 지엽적이고 선정적으로 다뤄지는 글들의 주제는 "브레히트와 친구들"에서 원래 시작했던 것이 "브레히트와 여인들"도 모자라 이제는 "브레히트의 연인들"로까지 부풀려서 선정적인 기술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류의 글의 제목이 잘 말해주듯, 브레히트의 여자 문제, 특히 브레히트가 문학이나 연극활동을 통해 교류했거나 공동작업에 참가했던 여인들을 모두 "연인들"이라는 통속적인 틀속에 제한시켜 아주 지엽적이고도 선정적인 잣대로 부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물론 Fuegi가 자신의 주장을 반증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던 자료들에 못지않은 문헌적으로 설득력있는 새로운 자료를 제시한다면, 그리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글을 집필하는 필자들이 문학자이거나 교수이긴 하지만, 정작 브레히트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전공자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제에 스스로 유혹되어 식자연하는 필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매혹-유혹적" 주제에 대해, 자신들이 접한 극히 '제한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선정적이고도 현학적이다 못해 PC의 힘을 이용해 비과학적인 글들을 무한정 쏟아내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문학도 엄연히 학문이며 특히 작가나 동시대 사람들의 개인적인 사생활 문제가 언급되는 글일수록 엄격하게 검증된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할 것이며 이 사실을 바탕으로 필자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논지가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학문적으로는 물론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이런 류의 글들은 학문적인 글이 아니라 그야말로 DT (Data Technology 데이터 기술) 시대에 쓰여지는 그럴듯한 '가짜정보' 내지 '찌라시'로 전락할 위험성이 크다 보겠다. 


   더군다나, 브레히트 자신이 수많은 기록이나 작품들에서 이에 대해 언급한 자료들은 물론이고 학문적으로 검증된 연구자료들도 수없이 많다. 글을 쓰는 필자는 물론, 독자들이 IT (Information Technology 정보 기술) 시대를 넘어서 서 DT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문헌적 사실에 입각해서 데이트 검증이 전혀 안된 글은 그야말로 애초에 설득력을 상실했고 인정받기를 포기한 '찌라시성' 글로 취급받아도 마땅할 것이다.


   개인의 사생활 문제를 언급하는 이런 글들이 아주 기본적인 문헌적 사실을 얼마나 소홀히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브레히트와 여인"이란 주제를 다룰 때, 우선적으로 즐겨 다루는 마리 로제 아만 Marie Rose Aman은 "마리 A.에 대한 기억"이라는 시 속에서 "Marie A."라고 표기한 브레히트가 18살 되던 해인 1916년 초여름 (5월)에 만나 사궜던  16살짜리 여학생이다. 브레히트가 시 제목을 "첫키스에 대한 기억"이라 하지 않고, "마리 A.에 대한 기억"으로 명명함으로써, 브레히트의 전형적인 "흔적 지우기"가 아닌 "흔적 남기기" 형태로 인간들의 기억 속에 사라질 한 소녀 "마리 로제 아만"의 이름을 후세대 독자들에게 그대로 밝히고 기억하게 한, 작가로서 브레히트의 전형적인 인간애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소녀를 '브레히트의 여인', 심지어 '브레히트의 연인'으로까지 다루며 갖은 억측을 내놓고 있다. 국내 K대학 문학강의에서 진행되고 온라인 상에 공개된 "브레히트와 여인들"이란 글에서 브레히트의 1920년 8월 28자 일기에서 "마리"라는 이름 (GBA 26, 144)을 발견해 내고서는 "브레히트가 1920년 늦여름까지 마리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까지 사실 아닌 거짓을 강조하고 있다. 고향 도시에 사는 소녀이니 당연히 '아는 척도 안하고 지냈다'고는 할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일기 내용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이것은 브레히트가 짧은 "희비극"에 대한 내용을 요약하여 적은 것이며 'Marie'란 이름은 등장인물일 뿐이다. 그야말로 1936년에 쓴 브레히트 작품에 "마리"란 이름이 우연히 등장한다고, '첫키스의 소녀인 마리와 이때까지도 사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과 같다. 

     

    마리 로제 아만은 브레히트가 초기 시에서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10대 소년인 브레히트가 잠시 관심을 가지고 눈독 들였고 자신의 첫키스 상대가 된 소녀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마리 Marie를 '브레히트의 여인' 내지 '브레히트의 연인'으로 보고 갖은 추측성 글을 쓸 어떤 근거도 권리도 '글쓰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700여쪽의 방대한 책인 BC가 아무런 증명할 길도 없는 개인의 사생활 문제들까지도 서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듯이, 글의 주제를 "브레히트와 연인"으로까지 확대하다 보니 사실과 다른 주장들 즉 문헌적 사실과 동떨어진 '16살 처녀를 임신시켰다'는 선정적인 주장에 중점을 둔 '브레히트는 16살짜리 BI를 임신시켰다'와 같은 자극적인 기술을 마다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문헌적으로 전혀 확인할 수도 없는 "연인"으로 - 뮌헨은 물론 베를린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던 친구 헤다 쿤 Hedda Kuhn이나 여배우 카롤라 네어 Carola Neher까지도 - 꼽고 있으며, 심지어 정식 결혼한 부인인 마리안네 쪼프 Mariane Zoff나 헬레네 봐이겔 Helene Waigel도 "연인"으로 기술하는 웃지못할 실수를 범하고 있다. 더나아가 브레히트 연구자라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단순한 문헌적 사실까지도 실제 사실과는 전혀 다른 주장들도 서슴치 않는다.


    이런 글들의 논지는 "브레히트의 여성문제가 복잡했다"는 점을 부풀려 강조하고자 하는 악의가 우선적으로 저변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브레히트 주위의 많은 여성들과 그들과의 관계는 우리 시대 현대 여성들조차도 쉽게 이해(오해)하기 어려운(쉬운) 면이 있다. 하지만, 문헌적 사실과 동떨어지거나 사실과 상관 관계가 전혀 없는 '허위나 거짓'을 가지고 이런 점을 부각시키고자 하거나, 자신들의 논지를 강조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이 소위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거나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 강단에 선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DT시대를 사는 독자들이나 학생들이 구글 서치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문헌적 사실을 논문이나 강의라는 수단을 통해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거짓'을 자랑삼아 확대 재생산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브레히트의 여성 문제나 창작 문제와 관련해서 다음의 질문들 - 1) 망명 생활에다 세계대전이란 악조건 아래서 만일 주위 여인들의 자발적 헌신과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브레히트"를 전후에 접할 수 있었겠는가? 2) 왜 여인들은 한결같이 모든 희생을 감내하며, 그것을 승화시켜서 브레히트의 손과 발이 되어 기꺼이 공동작업 Kollektive Arbeit에 임했을까? 3) 왜 이들은 자신의 작가적인 소질과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보다 "브레히트 Bertolt Brecht"란 이름 뒤에 있기를 원했을까? - 에 대한 답을 찾고자 기술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훨씬 유익할 것이다.



피스카토르, 네어, 이어링과 브레히트 (1927년 베를린)



   
브레히트는 자신의 연극 작업이나 문학 창작에 참여했던 모든 동료들에게 각자의 능력과 창의력을 그 작업에 최대한 불어넣도록 요구했었다. 이에 대한 입장을 『코이너씨의 이야기 Geschichten von Herrn Keuner』에서 브레히트는 잘 언급하고 있다. "요즘에는 혼자서 위대한 저서들을 써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지요"라고 개탄하며, "이들이 보여줄 수 있는 건 한 자루의 펜과 약간의 종이 뿐이지요! 그리고 아무런 도움도 없이, 각자 자기 손으로 구할 수 있는 빈약한 재료를 가지고 제각기 오막살이를 짓는 것"이며, "이들은 혼자서 지을 수 있는 오막살이보다 큰 건물을 전혀 알지 못하지요!" (GBA 18, 441)라고 비웃고 있다.


    브레히트가 공동작업자들에게 얼마나 각자의 창작활동을 강요했는지 잘 알려져 있다. 또 브레히트와 공동작업을 했을 경우에는 항상 그들의 이름이 브레히트의 이름과 함께 나란히 공동 작업자로서 명기되어 있다. 이 공동작업에는 누가 작업했다고 명기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공동작업을 위의 인용한 글에서와 같이 이해했고, 또 그러한 이해 아래서 공동작업을 했기에 그런 문제는 애초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서 '공동작업'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브레히트가 스승으로 죽을 때까지 존경했던 포이터방어 Lion Feuchtwanger와의 공동 작업을 살펴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1942년 10월부터 1943년 1월까지 미국 산타 모니카에서 브레히트와 포이터방어는 공동작업을 한 뒤에 서로 각각 따로, 즉 브레히트는 희곡 『시몬느 마샤르의 환영들 Die Gesicht der Simone Machard』을 집필했고, 포이히트방어는 1944년에 그의 소설 『시몬느 Simone』를 출간했다. 포이히트방어는 이 소설을 『Samuel Goldwyn』이란 영화사에다 영화 대본으로 그 당시 파격적 가격인 5만 달러에 팔아 넘겼다. 그런데, 포이히트방어는 아무런 법적인 의무가 없었지만 수익금을 브레히트와 반반씩 나눠 가졌다. 이것은 브레히트의 친구들이나 공동작업자들이 규정하고 있는 '공동작업'의 단면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본 글을 맺기 전에, "브레히트와 연인들"이란 주제에 유혹된 필자들에게 '이런 논지를 펴기 전에 우선적으로 문헌적 사실을 철저하게 확인하고 기술에서 오류를 최대한 줄이고자 노력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야, 이런 글들이 최소한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짧은 글에서 아주 기초적인 문헌적 오류를 도처에 범하고 있으면서 글 자체의 논지에 대해 인정받기를 바란다면 뻔뻔한 철면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찌기, BCI2000 (브레히트 컴퓨터 인덱스 2000)의 문학 연구에 실제 적용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함은 물론이고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의 자의적 해설을 피할 수 있는 구체적 실례로 "브레히트와 석가 - 'Brecht-Computer-Index 2000' 분석자료를 이용한 선행된 브레히트 연구결과의 검증" (1998, 브레히트와 현대 연극)이란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글을 쓰는 필자는 물론이고 독자들도 이제는 IT시대를 넘어 DT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필자가 자신의 제한된 독서력이나 제한된 자료만으로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식'의 비과학적이고 자의적인 글이나 '찌라시성의 글'을 계속 양산해 내는 일을 가능하면 스스로 피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글을 쓰기에는 DT시대를 사는 필자(학자나 교수)들이 너무 뻔뻔하고 안일하거나 독자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필자들이 이런 오류를 사전에 피할 수 있도록 "BRECHTCODE"는 브레히트에 관한 한, 대량자료 분석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필자들은 온라인에서 쓰레기 문서에 속하는 가짜 정보의 양산을 가능한 줄여야 할 것이다. '찌라시'가 아닌 문헌학적으로 고증된 양질의 글을 쓰고 읽히는 것이 글 쓰는 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며 또 이런 글을 읽는 독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닐까!?


    
  (독일에 보기 드문 혹한이  덮쳐 온 2018년 2월 말에)

 

 

 

배경 음악은 Yanni의 "Until the Last Momen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