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B. Brecht/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와 포이히트방어 연구의 사각(死角)지대

그리스도의 편지 2014. 10. 28. 00:05





브레히트와 포이히트방어 연구의 사각(死角)지대
- Peter Plischka『Kalkutta, 4. Mai』(Calcutta 1994)
 
 
 


소위 서평이라 함은

독자들에게 무엇보다도 독서의 충동을

문학 이론가들에게 연구의 욕구를

비평가들에게 비평의 칼날을,

그리고 저자에게는

보다 알찬 내용을 주문하는 데 있다.

또, 아무런 욕구도 없는 자들에게는 

최소한의 눈요기라도 줄 때

그 역할을 다한다.


(KMJ,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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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도이취 문학작품 중에서 브레히트 문학만큼 많이 연구된 작가의 문학도 찾아보기 드물 것이다. 이 사실 뒤에는 물론 동․서 냉전이라는 이념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브레히트 사후부터 80년대 말에 있은 통일에 이르기까지 동․서독 간의 정치적 문제가 많이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수많은 브레히트와 관련한 연구들은 브레히트가『서사극』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을 기반으로 해오던 종래 서구 연극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작가의 독보적인 업적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책 표지. 건물은 현재 Calcutta에 남아 있는 Hastings의 집이다.


    그런데, 브레히트 연구에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는 사실이 많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책이 지난해 4월 인도 캘커타 Calcutta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Perspectives on Lion Feuchtwanger and Bertolt Brecht. Calcutta, 4th May』라는 제목을 가진, 책의 편저자부터가 아주 특이한 책이다. 편저자 플리스카 Peter Plischka는 예상 밖에도 전형적인 직업 외교관 출신이고, 현재 켈커타 독일 총영사관의 총영사로 재직하고 있다. 


   포이히트방어에 관한 왠만한 상식과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책 자체를 대하자마자 별반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볼 수가 있다. 제시된 자료들 중에 굳이 몇 가지 오류를 지적한다면, 저자가 제시한『Kalkutta, 4. Mai』의 초판이 1927년 베를린의 Propyläen 출판사에서 간행된 것이 아닌 암스테르담의 Querido 출판사에서 1936년에 발간된 것을 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초판은 원래 “3 angelsächische Stücke”이란 제목으로 발간되었고, 이 책에서 포이히트방어의 세 희곡 중에 하나가『Kalkutta, 4. Mai』이다. 그런데 초판에서『Kalkutta, 4. Mai』부제가 실수로 “4막의 식민지 이야기”라 적고 있고, 책의 표제 밑에다가 “이 작품을 나는 브레히트와 함께 집필했다. Dieses Stück schrieb ich mit Bertolt Brecht”라고 명기하고 있다. 반면에 1936년 판은 부제를 “3막의 식민지 이야기”로 수정하여 적고 있으며 “이 작품을 나는 1925년에 브레히트와 함께 끝마무리 했다. Dieses Stück überarbeitete ich im Jahre 1925 gemeinsam mit Bertolt Brecht”라고 덧붙여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후자를 자료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공연일지 역시 원래 초연이나 다른 극장에서 공연된 사실과 몇 달의 시간적인 차이가 있다. 1927년 11월 쾨니히스베르크 Königsberg『노이엔 사우스필하우스』와 크레펠트 Krefeld의『시립극장』에서 동시 초연되었으며, 1928년 3월에서 8월까지 다른 도시 극장에서 공연을 자주 시도했었다. 그런데, 1928년 6월 12일 베를린 시립극장에서 에리히 엥겔 Erich Engel이 연출을 맡고, 무대장치는 네어 Caspar Neher가 음악작곡은 아이슬러 Hans Eisler가 맡아서 이루어진 공연이 무엇보다도 대성공을 거두었었다. 그러나, 저자는 초연과 다른 공연 자료를 상세하게 검토하지 않고, 뷔스 Monika Wyss가 “브레히트 초연 비평과 극평” (뮌헨 1977)이란 책에서 제시한 자료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외 제시된 연구자료들은 각 주제별로 분류되었고, 또 작품의 줄거리까지 친절하게 요약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대 흐름 속에서 팽배했던 상치개념 즉, “행동-관망, 권력-포기, 동양-유럽 그리고 부처-니이체” 등의 서로 상치되는 개념을 포이히트방어는 자신의 문학의 주테마로 삼고 있었다. 유럽의 제국주의가 한창 극성을 부리고 일본조차도 한국을 합방하는 등 식민-제국주의에 유럽의 강대국들이 다투어 가담을 하자, 동시대 유럽인들에게 일종의 경고로 “행동하는 자는 항상 비양심적이다. 관망하는 사람만큼이나 양심을 가진자는 아무도 없다”는 모토아래, 1915/16년 포이히트방어는 인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구상했다. 물론 이 당시 포이히트방어는『Vasantasena』의 번안작업도 병행하고 있었다. 이 작품이 인도 캘커타의 총독이자 실제적 인물인 “Warren Hastings (1732 -1818)”을 주인공으로 집필된『Warren Hastings』이란 희곡이다. 이 작품에서 포이히트방어는 “식민지 전쟁에서 유럽 열강이 아무리 동양을 정복한다 할지라도, 이 전쟁은 결국 유럽인들이 제발로「부처 Buddha」를 만나러 가는 걸음마 이외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1916년 게오르그 뮐러 출판사에서 발간된『Warren Hastings』


    이 작품을 1925년 브레히트와 공동작업을 통해 끝마무리 짓고, 1927년 Propyläen 출판사에서『캘커타 5월 4일 Kalkutta, 4. Mai』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간행한 것이다. 표제 밑에다가 포이히트방어는 분명하게 “브레히트와 함께 작업한 것”으로 명기하고 있다. 그리고, 1927년에 있은 초연은 물론 대성공을 거둔 1928년 6월 12일 베를린 시립극장에서 에리히 엥겔 Erich Engel의 연출아래 공연될 때도 “Lion Feuchtwanger와 Bertolt Brecht의 3막 (6장)의 식민지 이야기”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1984년 베를린 Aufbau 출판사에서 간행된 전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재발견”이라고 거론할 것도 없으며 의심할 것 조차도 없이『Kalkutta, 4. Mai』은 두 작가의 공동작업을 통해서 완성된 작품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연구들에서『Kalkutta, 4. Mai』를 포이히트방어의 작품으로 인정은 했지만, 전혀 책표지 아래에 명기된 “브레히트와 공동작업을 했다”는 사실은 아예 무시했던 것 같다. 이렇게 볼 때, 포이히트방어와 끝마무리를 하거나 공동작업을 한 브레히트의『총림 속에서 Im Dickicht』(1923),『영국왕 에드워드 2세의 생애 Leben Eduards des Zweiten von England』(1924), 그리고 1942년 10월부터 1943년 1월까지 미국에서 공동작업을 한 희곡『시몬느 마샤르의 환영들 Die Gesicht der Simone Machard』등의 작품 위상이 애매해지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간단하게 말해서,『Kalkutta, 4. Mai』도 브레히트 전집에 포함되든가, 아니면 세 작품이『Kalkutta, 4. Mai』와 같은 위치에 놓이든가 하는 애매한 상황이 되고만다. 두 작가가 분명히 어떠한 약속아래 공동작업을 했고, 또 각기 번갈아 가면서 한번은 브레히트가 주작가가 되고 포이히트방어가 공동작업자로 남았고, 또 반대로 포이히트방어가 주작가로 브레히트가 공동작업자로 남았을 것이다.


   당장 문헌적으로 연구하고자 할 때 한 작품도 아니고 네 작품이 이런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에, 두 작가 사이에 이러한 문제는 아직까지도 시비가 되고 있는 (예를들어 John Fuegi: Brecht & Co. New York 1994) 다른 공동작업자와의 “저작권과 표절시비 문제”를 더 이상 설명할 길이 없게 되고 만다. 그리고 브레히트를 작가로 발굴한 포이히트방어와의 공동작업은 후일 브레히트의 공동작업자였던 하우프트만, 스테핀 그리고 베를라우의 경우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두 작가가 그들의 공동작업을 서로 분리시켜서, 한 작품은 포이히트방어의 저작권으로 그리고 나머지 세 작품은 브레히트의 저작권으로 남기고 있다. 그래서 이제까지 이들 작품이 서로 달리 브레히트와 포이히트방어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각각 분리되어 연구되었다. 물론 이 사실이 1977년부터 간행되었던 포이히터방어의 전집에서 “『캘커타 5월 4일 Kalkutta, 4. Mai』는 브레히트와의 공동작업된 작품”이란 것이 분명하게 확인되었지만, 브레히트 연구가들에게는 새로운 전집(GBA)의 발간을 착수하기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주 흥미롭다.




히틀러가 극성이던 뮌헨을 떠나 "켈커타 5월 4일"을 공동 작업하던 베를린 시절 
중간에 흰 옷이 첫부인인 오페라 가수 마리안네 브레히트 (1927년)


    일찌기 1970년에 이미 봐이스스타인 Ulrich Weisstein이『Als wär's ein Stück von Brecht. Ein Vergleich zwischen Lion Feuchtwangers Schauspiel "Warren Hastings, Gouverneur von Indien" und dessen Neufassung "Kalkutta, 4. Mai"』란 논문에서 이 작품의 생성과 브레히트의 다른 작품과의 관계에 대해서 상세하게 연구했다. 봐이스스타인은 가정적인 논제로 출발한 자신의 연구논문을 통해『Warren Hastings』란 작품에서『Kalkutta, 4. Mai』란 작품으로 탈바꿈한 “3막의 식민지 이야기 Drei Akte Kolonialgeschichte”라는 부제가 시사하는 식민지 정책을 비판한 작품의 주제는 브레히트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어서 브레히트 전집(GBA) 작업이 막 시작되었던 1988년 베게 Carl Wege는 그의『브레히트와 포이트방어 Bertolt Brecht und Lion Feuchtwanger: "Kalkutta, 4. Mai』(München 1988.)이란 박사논문에서 이 사실을 다시 공식적으로 문제를 삼았다. 하지만, 이 박사논문 조차도 브레히트 연구가들에게 관심을 돌리게 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독문학자가 아닌 캘커타 총영사 플리스카에 의해서 브레히트 연구자들에게 마침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이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포이히트방어는 1925년, 즉『Kalkutta, 4. Mai』를 기점으로 사실상 희곡 창작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고, 무엇보다도 소설가로서 독일 문학사는 물론 세계 문학사에서 굳건한 자리를 다졌다. 이와는 반대로, 브레히트는 무엇보다도 드라마 작가로 자리를 다졌다.『Kalkutta, 4. Mai』공동작업 이후, 브레히트는 식민지 정책의 비난을 주제로 집필해오던『Joe Fleischhacker』란 작품의 집필을 중단하고, 오페라 극『마하고니 Mahagonny』와『서 푼 짜리 오페라 Dreigroschenoper』이후로 계속『교훈극 Das Lehrstück』으로 자신의 창작 스타일을 바꾸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도시의 총림 속에서 Im Dickicht der Städte』나『남자는 남자다 Mann ist Mann』란 작품에서 등장하고 있는 배경이나 주제를 비교해 볼 때, 포이히트방어와 브레히트가 공동작업한『Kalkutta, 4. Mai』가 브레히트 작품세계에 위치하고 있는 중요성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이제까지 브레히트 연구에서 희곡보다 소설이 비교적으로 경시된 것과 같이, 포이히트방어 연구에서는 마찬가지로 희곡이 소설보다는 훨씬 경시된 점이 없지 않다. 그 결과로 포이히트방어가 브레히트를 작가로 발굴했고, 뮌헨시절 이후로 베를린에서는 물론 망명생활에 이르기까지 단절없는 친교를 유지했으며 계속적인 공동작업을 했지만, 둘간의 작품이나 문학적인 영향과 수용이 거의 관심대상에서 제외되었었다. 나아가서는 두 작가가 구체적으로 공동작업을 했던『Kalkutta, 4. Mai』가 브레히트 연구자들에게는 이 작품을 두 작가가 공동작업을 통해서 탄생시켰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알려지지 않았었던 것 같다.
    결국 두 작가의 연구를 현재 시점에서 살펴본다면, 이러한 구체적인 공동작업의 비교나 서로 간의 극작품의 수용과 영향관계를 살펴봄이 없이는 브레히트 연구에 아직까지 많은 사각(死角)지대를 남기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 무엇보다도 플리스카의 업적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대로 인도 켈커타 에서 발간된 이 “신간”에 특별히 새로운 사실은 발견되지 않는다. 대부분 내용이 포이히트방어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한번씩 거론된 것이고, 단지 브레히트 연구자들에게 이제까지 사각(死角)지대에 있었던 자료나 연구 논문들을 모아서 엮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Kalkutta, 4. Mai』라는 작품이 브레히트와 포이히트방어의 공동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그야말로 재확인했고, 동시에 이 작품을 브레히트 연구자들에게 새로이 연구의 대상으로 관심을 돌리게끔 했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그야말로 재발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저자 플리스카는『Theater heute』(95년 2월호)에다『Kalkutta, 4. Mai. Ein Stück von Brecht und Feuchtwanger in Kalkutta wiederentdeckt』란 제목으로 직접 이에 관해서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이 보도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작품이 브레히트와 포이히트방어가 함께 공동작업했다는 사실이 이제까지 연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재강조하고 있는 사실이다. 물론 책의 저자인 켈커타 총영사가 직접 작업을 위해서, 현재 독일에서 유일한 칼스루에 대학교 브레히트 연구소 (Bertolt Brecht Arbeitsstelle)에 찾아와서 소장인 크높 교수에게 직접 확인을 했다는 것이다. 이 때까지 이 작품이 브레히트 연구에서 아예 관심대상에서 제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크높 교수는 물론 새 전집 편저자들이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전집에서도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다. 하지만, 브레히트가 광범위하고 아주 전문적으로 연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중요한 사각지대를 많이 남겨놓고 있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야말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옛말을 실감나게 하는 사실이다.



살아서 마지막 대화와 사진이 된 미국을 떠나기 직전 포히터방어 집 뜰에서  
포이히트방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브레히트 (1947)


    왜냐하면, 브레히트 자신이 포이히트방어를 소위 몇 안되는 스승 중의 한 사람으로 일컬었고, “미학 법칙들을 깨뜨리고자 하는 자신이 포이히트방어를 통해서 광범위한 지식을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두 작가간의 반평생 동안 지속된 친교관계는 두 작가의 연구를 위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물론 포이히트방어 역시 서로 간의 수용관계를 추정할 몇몇 글들을 남기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브레히트 사후에 봐이겔에게 보낸 편지와『의마와 형식 Sinn und Form』이란 잡지의 특별호인 “두 번째의 브레히트 특집권”에 게재한『브레히트 Bertolt Brecht』(S. 103-108)란 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1956년 8월 14일 브레히트가 죽고 난 뒤 포이터방어가 봐이겔에게 보낸 전문 “사랑하는 헬리, 우리 둘 모두가 많은 것을 잃어 버렸네!”는 말할 것도 없고, 장례식이 끝나고 2 주 뒤인 8월 24일에 봐이겔에게 보낸 편지에서, “헬리, 브레히트 없이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의 정상궤도를 찾는다는 것은 나에게 더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구려! 내가 유럽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나는 제일 먼저 브레히트를 떠올렸다오. 브레히트가 여기 이 집 현관에서 나와 작별하면서 내가 곧 뒤따라 와야 한다고 재촉했을 때, 우리가 그리 오래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라면서 그들이 베를린에서 함께 공동작업 선상에 있지 못한 아쉬움을 잘 피력하고 있다. 계속해서 “브레히트는 나와 모든 것에서 상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아주 가까왔으며, 또 그가 항상 사적인 문제는 소심했지만 중요한 문제에 관해서는 항상 나에게 격의없이 털어놓았고, 그는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나에게 많은 신뢰감을 주었지”라고 적고 있다. 이만큼 이들은 어려웠던 긴 망명생활은 물론 작가로서의 그들의 작품생활에도 아주 가까운 친교를 지속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막상 두 작가를 연구하고자 시도하면 가장 먼저 봉착하게 되는 난관이, 그 많은 전제조건에도 불구하고 두 작가들이 남겨둔 것은 그들의 작품들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들의 서신교환이나 일기는 물론 다른 글들에서 공동작업에 관해서 언급을 거의 하지않고 있고, 완벽할 정도로 "그 흔적을 없애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 작가가 공동작업한 작품들을 꼽아보면 부분적으로『총림 속에서 Im Dickicht』(1923)가 첫번째의 작품이고,『영국왕 에드워드 2세의 생애 Leben Eduards des Zweiten von England』(1924),『캘커타 5월 4일 Kalkutta, 4. Mai』(1925)을 들 수 있다. 그리고 1942년 10월부터 1943년 1월까지 미국 산타 모니카에서 공동작업을 한 후에 각각 따로 브레히트는 희곡『시몬느 마샤르의 환영들 Die Gesicht der Simone Machard』을 집필했고, 포이히트방어는 1944년에 그의 소설『시몬느 Simone』를 출간했다.
    그런데, 포이히트방어는 이 소설을『Samuel Goldwyn』이란 영화사에다 영화 대본으로 그 당시 파격적 가격인 5만 달러에 팔아 넘겼다. 포이히트방어는 아무런 법적인 의무가 없었지만, 수익금을 브레히트와 반반씩 나눠 가졌다. 이것은 그들이 규정하고 있는 공동작업의 단면을 잘 설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두 작가 어느 누구도 이 공동작업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치 않고 있다.



시몬드를 한창 적업하던 시기에 찍은 브레히트와 포이히트방어 부부 (산타모니카)


    물론, 이들 둘 사이에 공동작업에 대해 제삼자들이 기록한 유명한 일화들이 있다. 브레히트가 뮌헨에서 학생시절이던 즉 1919년 3월경 브레히트는 하루라도 빨리 작가로 입신하고자는 욕망으로『한 밤 중의 북소리 Trommel in der Nacht』의 애초의 원고였었던『스파르타쿠스 Spartakus』와『바알 Baal』원고를 가지고 무작정 포이히트방어를 찾아 갔었다. 그런데, 브레히트의『스파르타쿠스 Spartakus』의 도움을 입어 포이히트방어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Thomas Wendet』를 쓴 사실을 나중에 안 브레히트는 “포이히트방어는 탈 수도 없는 자동차 한 대를 나에게서 훔쳤다”고 언급한 사실이다. 또 하나는 포이히트방어와 브레히트가 산타 모니카에서『시몬느』공동작업을 하면서 포이히트방어 앞에서 브레히트가 자신의『서사극』이론을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이때 애초에 사실적이고도 자연주의풍의 작품을 구상했던 포이히트방어는 그에게 “그렇다면『서사극』으로 이젠 내 밑구멍이나 닦아라”고 했던 유명한 일화를 들 수가 있다. 이 두가지 일화를 통해서 두 작가간의 상당한 견해차가 있었음을 쉽게 추정해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이미 작가로 원숙한 경지에 접어든 브레히트는 이 공동작업에 대해서 자신의『작업일지』에다 “그는 작품 구성에 있어서 감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언어적인 멋을 존중할 줄 안다. 또한 그는 미적이나 극적인 풍부한 착상을 가지고 있고 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고, 항상 논증을 존중할 줄 안다. 그리고 그는 인간적으로 대하기 편한 아주 좋은 친구이다”고 적고 있다. 공동작업을 통해서 20대 젊은 나이에 패기만만하게 포이히터방어에게 도전했던 것과는 달리 브레히트는 인격적으로나 작가로서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어찌했건 포이히트방어가 봐이겔에게 편지를 보낸 것처럼, 그들은 다르지만 많은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고, 서로 간의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을 공동작업을 통해 상호보완할 수 있었으며 또 수용했던 것이다.
    모든 면에서 서로 간의 영향을 주고 받은 사실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기본자료의 결핍으로 이에 관한 연구는 여전히 브레히트 연구에서 미개척지로 남아 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들어 본다면, 제일 먼저 위에서 열거한 공동작업으로 남은 작품들의 명확한 해설과 믿을 만한 자료의 추정이나 발굴이 무엇보다도 관건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브레히트가 포이히트방어를 통해서 접촉한 인도극, 특히『산스크리트』극과의 접촉을 한 사실이다.


    브레히트가『바알 Baal』의 1918본(本)이나『남자는 남자다 Mann ist Mann』등 작품들에서 다양하게 남겨놓은 아시아 극의 서사적 요소는 포이히트방어의 번안극『Vasantasena』(1915)와『왕과 무희 Der König und die Tänzerin』(1917)를 통해서 수용한 인도극 특히『산스크리트』극의 서사적 요소란 관점으로 안목을 돌리지 않는 한 설명할 길이 모호하다. 다시 말해서,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브레히트가 아시아 연극을 수용한 문제에 관한 완전한 답을 얻기가 어렵다.
    그런데, 의외로 브레히트 연구자들이 포이히트방어가 인도 산스크리트어에 정통했었고, 그가 위의 두 작품을 번안해서 1910년대는 물론 1930년대 초반까지 흥행에 굉장히 성공한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브레히트가 산스크리트 극의 서사적 요소를 포이히트방어의 번안극 공연을 통해서 배워왔다는 사실을 아예 상상조차도 하지를 못하고 있다. 『남자는 남자다 Mann ist Mann』에서 “갈리 가이”씨가 전쟁의 무기로 변화하는 주제인 현대사회,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변신의 문제”는 포이히트방어가 번안한 『산스크리트』연극『Vasantasena』에서 주테마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브레히트가 당시의 시대상에 맞도록 개작한 것이다. 또 막간극『새끼 코끼리 Elefantkalb』도 역시 마찬가지로『Vasantasena』에서 테마를, 클라분드의『백묵원 Der Kreidekreis』에서 모티브를 브레히트가 차용해 온 것이다. 이들 세 작품을 직접적으로 동시 비교하지 않고는 브레히트나 포이히트방어의 기본서는 물론 연구서 어디에서도 그러한 언급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포이히트방어와 브레히트간의 반평생 동안 지속된 친교나 이들 사이의 공동작업 뒤에 브레히트 연구에서 이제까지 숨겨진 의문이 의외로 풀릴 수가 있다고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 릎라스카의 책은 이제 막 시작된 작업의 교두부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플리스카의 책은 내용과 신간 자체로서의 의미보다는 앞으로 브레히트나 포이히트방어 연구에서 새로운 분야를 다양하게 제시할 많은 가능성을 제공함은 물론 이제까지 브레히트 연구에서 설명하기 어려웠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가능성을 충분하게 내포하고 있다.  (1995년 여름에)

 

 

 

배경 음악은 Tom Barabas의 "Sonata in G Minor"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