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B. Brecht/쉽게 쓴 브레히트

[스크랩] 브레히트의 연인들

그리스도의 편지 2018. 2. 16. 18:43

브레히트의 연인들


박영구 (한국외국어대․독문학 박사)


삶이라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대형 사건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그 배후에 반드시 여자가 개입되어 있다는 말을 흔히 떠올리곤 한다. 다분히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담고 있는 그러한 관점과는 달리, 무릇 위대한 예술의 이면에는 항상 뛰어난 여성의 존재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는 괴테의 말을 새삼 곰씹어보지 않더라도, 여성적인 본질은 삶의 근간이자 예술의 가장 중요한 요체라 할 수 있다. 예술 자체가 여성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도 여성은 예술가의 감성을 자극하고 시인에게 영감을 주며 불후의 예술을 탄생시킨 모체가 되어 왔다. 위대한 예술가의 삶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사랑이 창작의 원천이었고, 불멸의 작품이 탄생되기까지는 여성의 헌신과 희생이 잇따르곤 했다.

여성과의 뒷이야기로 치자면 독일이 낳은 시성 괴테와 악성 베토벤의 경우가 대표적이겠지만, 이 점에서는 브레히트도 결코 만만찮은 인물이다. 아니, 브레히트는 그 어떤 작가도 감히 넘보기 힘들 정도로 화려한(?) 여성편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앞선 예술가들의 선례와는 달리, 브레히트의 문학과 연극은 그 빼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여성 문제 때문에 일부 진영으로부터 신랄한 비난을 받아 왔다. 심지어 몇 해 전에는 미국의 존 휴기 교수가 “브레히트의 작품 거의 대부분이 사실은 그의 애인이었던 세 명의 여자가 쓴 것”이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하고 나서기도 했다. 물론 그러한 주장에는 엄청난 과장과 왜곡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그 뒤로 속속 밝혀지면서 휴기의 저서는 휴지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기는 했다.

하지만 일부 평자 가운데는 여전히 브레히트의 예술에 대한 공정한 평가보다는 그의 사상에 대한 마뜩찮은 심정을 사생활에 대한 공격으로 대체해서 표출하려는 이가 적지 않은 듯하다. 이것은 한국적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브레히트의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브레히트의 여성관계까지 무작정 옹호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왜냐하면 일부 여성주의자들의 온당한 지적처럼, 브레히트가 주변 여성들의 ‘사용가치’를 오직 자신의 예술 목적만을 위해 활용했다는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다만 우리 관객과 독자들의 관심에 부응하여 브레히트를 둘러싼 여러 여성들을 객관적 사실 그대로 소개하고자 할 뿐이다. 하지만 브레히트를 거쳐간 그 숱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 전하려면 실로 방대한 지면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브레히트의 삶과 예술에서 특히 긴밀한 관계를 맺은 여성 몇 명, 그리고 그의 공동작업에서 아주 중요했던 비범한 여성 몇 명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상을 한정시키고자 한다.

청년 시절 브레히트의 여자관계는 단순히 젊은 날의 객기로 넘겨버리기에는 문제가 있을 만큼 참으로 복잡다단했다. 그런 상황에서 1919년, 브레히트는 21세의 나이로 의사의 딸 파울라 반홀처(Paula Banholzer)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프랑크(Frank)를 낳게 된다. 그런데도 브레히트는 당시 아우그스부르크 극장의 전속 오페라 가수였던 마리안네 초프(Marianne Zoff)와 만나서 1922년 뮌헨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이듬해에 딸 한네 히옵(Hanne Hiob)을 낳는다. 그 다음 해인 1924년, 미혼모 반홀처는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고, 브레히트의 아들 프랑크는 나중에 나치군으로 참전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소련 전선에서 전사하고 만다. 첫 아내 초프와의 결혼생활도 얼마 가지 못했는데, 딸 히옵이 태어난 해에 이미 별거 상태에 들어간 두 사람은 1927년에 법적으로 이혼한다.

그 뒤로 브레히트가 두 번째 아내 헬레네 바이겔(Helene Weigel, 1900-1971)과 결혼식을 올린 것은 1929년의 일이지만, 두 사람은 이미 1923년에 알게된 사이였다. 오스트리아의 유태계 가정 출신으로 일급 연극배우였던 바이겔은 브레히트의 여성들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여성으로 꼽힌다. 그녀는 브레히트가 일상적인 일에서 벗어나 오직 창작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평생토록 도와주었다. 1932년 브레히트의 번안극 󰡔어머니󰡕에서 어머니 블라소바 역을 맡아 배우로서의 정점에 오르기도 했지만, 1933년부터 15년 동안이나 계속된 망명기간 동안 바이겔은 망명가족의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아내와 어머니라는 전통적인 여성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기나긴 망명생활을 끝내고 1948년 베를린으로 돌아온 직후, 그녀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서 억척어멈 역을 맡아 브레히트 서사극의 진수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연기를 펼친다. 이듬해에 브레히트와 함께 ‘베를린 앙상블’을 창단한 바이겔은 배우 겸 단장으로서 뛰어난 조직력과 재생산 능력을 발휘하면서, 브레히트가 의도한 바의 모범적인 여성상을 몸소 구현한다. 바이겔은 󰡔억척어멈󰡕 외에도 󰡔카라 부인의 무기󰡕와 󰡔제3제국의 공포와 참상󰡕 등의 주역을 맡아 브레히트 극작의 대변인이자 서사극의 전도사로서 생산적인 활동을 펼치다가, 1971년 󰡔어머니󰡕의 파리 초청공연을 마지막으로 일생을 마친다.

덴마크 출신의 여배우 루트 베를라우(Ruth Berlau, 1906-1974)는 헬레네 바이겔을 제외하곤 브레히트와 가장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22년 동안이나 공동 작업을 펼친 여성이다. 1934년 브레히트의 덴마크 망명 시절, 그녀는 코펜하겐 왕립극장의 전속배우이자 신문기자를 겸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어서 덴마크 최초의 노동극단을 창단한 뒤, 공연 관계로 브레히트에게 자문을 구한 것을 계기로 그의 문하생이 되었고, 이때부터 항상 생산적인 대화로써 망명기 브레히트의 창작 과정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939년 브레히트가 망명지를 계속 옮겨가야 할 상황이 되자 베를라우는 부유한 의사 남편과의 안락한 삶을 일시에 포기하고 선뜻 브레히트를 따라나서 그의 가족과 더불어 험한 망명의 여정을 끝까지 함께 한다.

베를라우는 덴마크에서 󰡔한밤의 북소리󰡕 공연 무대에 선 것을 시작으로, 󰡔어머니󰡕와 󰡔카라 부인의 무기󰡕를 직접 번역하고 연출을 맡아 자신의 노동극단에서 공연했으며, 󰡔도살장의 성 요한나󰡕를 왕립극장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그 후로 󰡔사천의 착한 사람󰡕의 공동작업자로 기여했고, 󰡔코카서스의 백묵원󰡕과 󰡔코뮌 시절󰡕, 󰡔가정교사󰡕등의 개작 작업에도 참여했다. 아울러 ‘베를린 앙상블’의 여러 공연 사진 기록도 그녀의 작품이며, 브레히트의 작품에서 베를라우는 ‘라이투’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살아 있다.

브레히트의 또 다른 연인 마르가레테 슈테핀(Margarete Steffin, 1908-1941)은 1930년대에 브레히트와 가장 밀접한 공동작업을 펼친 작업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농부의 딸로 태어난 슈테핀은 다양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반대로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베를린에서 출판사 경리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배우로서 좌파 문화운동에 참여하는 가운데 사회의식을 일깨우게 된다. 브레히트와는 1931년 베를린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데, 다음 해의 󰡔어머니󰡕 공연에서 브레히트가 슈테핀에게 하녀 역을 맡긴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히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 후 슈테핀은 브레히트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오르지만, 지병인 폐결핵의 악화로 일행과 떨어져 모스크바에 잔류한다. 그녀를 뒤로하고 미국행 배를 타러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난 브레히트는 기차 안에서 슈테핀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

슈테핀 역시 번역 작업으로 브레히트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타자 실력이 뛰어나 󰡔서푼짜리 소설󰡕과 많은 시를 정리해 주었는데, 이 작업은 단순한 타자 작업을 넘어선 공동작업의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슈테핀의 사후, 브레히트는 그녀가 정리해둔 시들에 󰡔슈테핀 시집󰡕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녀를 기렸다.

브레히트의 여성 공동작업자 가운데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Elisabeth Hauptmann, 1897-1973)은 1924년 브레히트를 만난 이후 가장 오랫동안 작업을 함께 한 연인이다. 의사의 딸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하우프트만은 교사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교직을 그만 두고 1922년 베를린에서 전문비서로 일하기 시작한 뒤 사회주의자로 변모하게 된다. 브레히트와의 첫 만남은 1924년에 이루어지는데, 당시 자신의 원고를 타이핑해줄 비서가 필요했던 브레히트에게 하우프트만은 외국작품을 영어로 번역해 준 것을 비롯해서 단순한 타자수 이상의 역할을 하게 된다. 󰡔서푼짜리 오페라󰡕도 그녀가 번역해준 영국 작가 존 게이의 󰡔거지오페라󰡕를 토대로 삼은 것이며, 영어로 번역된 일본의 ‘노극’을 브레히트에 소개해준 사람도 그녀였다. 하우프트만은 스스로도 희곡과 소설을 쓴 작가이기도 했지만,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와 󰡔도살장의 성 요한나󰡕를 위시한 여러 작품의 탄생에 결정적 기여를 한 생산적인 공동작업자였다.

나치 집권 후 일시 체포당한 하우프트만은 1934년 미국으로 망명해서 1943년에 브레히트와 다시 만나게 된다. 종전 후 1948년 독일로 돌아간 뒤로는 브레히트 작품 편집의 전권을 위임받아 브레히트 전집 출판 작업에 전념한다. 이 작업은 브레히트 사후에도 계속되어, 마침내 1967년 20권 분량의 전집 출간으로 빛을 보게 된다. 그 후로도 전집의 보완 작업에 전념하던 하우프트만은 1973년 암으로 세상을 뜬다.

이상에서 소개한 여성들말고도 브레히트 주변에는 재색을 겸비한 특출한 여성들의 손길이 늘 이어지곤 했다. 그들의 공동작업은 때로 브레히트의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대개는 스스로 생산적인 일을 찾아 나선 자발성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따라서 동구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후 그의 여성편력을 빌미 삼아 브레히트의 진보적 예술에까지 흠집을 내려던 일부 보수진영의 시도는 모두 설득력을 잃고 수그러들고 말았다. 그와 여성들과의 공동작업이 결코 노동력 착취나 강압적인 성격의 것이 아니었던 만큼, 사생활은 사생활 그대로 읽으면서 비판하고, 예술은 예술 자체로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출처 : 브레히트
글쓴이 : 동태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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