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B. Brecht/쉽게 쓴 브레히트

이해(오해)하기 어려운(쉬운) 브레히트 사랑 - V

그리스도의 편지 2014. 12. 2. 22:15





이해(오해)하기 어려운(쉬운) 브레히트 사랑
- 세 연인으로부터 세 아이 아빠된 26살박이 브레히트 사랑
 
 
 



뮌헨에서 칼 발렌틴 악단과 함께 연주하는 브레히트 (윈쪽 두번째)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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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중의 아기, 

브레히트 자식이 자라도록 둬라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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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 브레히트와 마리안네의 삼각관계



    아우크스부르크 행정법원의 1919년 10월 1일과 1920년 2월 19일자 서류에 따르면, 21살의 브레히트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아들 프랑크의 아빠로서 1920년 4월 8일 법적으로 출생신고를 했었다. 이런 브레히트를 보고 그 당시 공무원들이 아주 의아해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미성년인 ”Bi"의 아버지는 전권을 행사해서, 프랑크를 아우크스부르크로 데려오는 것을 저지했고 "Bi"도 소문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겨울을 킴라츠호펜에 계속 머물도록 했었다. 프랑크는 결국 3살이 될 때까지 스타르크씨 가정에 양육하도록 맡겨진다.


    젊은 두 연인의 사랑의 결과로 갓 태어난 어린 생명, 프랑크에게까지 가혹한 형벌로 남게 된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하루 4마르크** 지원을 받던 가난한 의대생 브레히트는 어려운 중에도 양육비를 책임지고 “Bi"와 둘이서 바쁜 와중에서 자주 방문하게 되지만, 프랑크는 결국 엄마, 아빠의 품에서 자라나기보다는 마리안네 쪼프나 헬레네 봐이겔의 친정집이 있는 비인에서 타인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십대 중반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직업학교를 마치고 아이러니하게도 히틀러의 군인이 되었고 1943년 11월 13일 전사하게 된다. 

    법적으로 부모를 가진 프랑크였다. 하지만, 브레히트를 증오하던 아버지에 이어 결혼한 남편도 브레히트는 물론이고 프랑크까지 증오했기 때문에, "Bi"는 친모로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각종 자료나 편지들에서 물론 브레히트는 망명 전은 물론이고 망명 후에도 아버지로서 아들 프랑크를 돕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첫사랑의 열매인 프랑크는 결국 히틀러의 전쟁 희생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갓 난 아들을 타인의 손에 맡기고 “Bi"는 아우크스부르크 부모 집으로 돌아오고 브레히트는 뮌헨에서 학업을 계속한다. 하지만, 브레히트는 작가로서 성공하기 위해서 무대인 극장과 출판사가 필요했었다. 그 당시에 독일에 영향력을 미치던 연출가, 배우들이 즐비했고 자기 작품을 출판해 줄 출판사와 무대에 올려줄 극장을 찾기 위해 1920년 2월 21일부터 3주간 베를린으로 첫 여행을 시도한다. 이 베를린행 기차 안에서 "마리 A.에 대한 기억"이란 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교류하던 헤다 Hedda Kuhn는 뮌헨을 떠나 1920년도 2월에 이미 베를린으로 대학교 적을 옮긴 뒤였다. 이미 베를린에 정착해 있던 헤다는 작가 봐르샤우어 Frank Warschauer 집에 머물수 있도록 소개하는 것은 물론이고, 희곡 "바알 Baal"을 출판을 위해 키펜하우어 출판사 사장인 카작 Kasack은 물론 클라분드 Klabund를 위시한 베를린 활동 작가들과 브레히트가 관계를 맺도록 다양한 기회를 만들어 준다. 심지어, 헤다는 그 당시 주머니에 돈이 늘 없던 브레히트를 감안해서, 일이 있으면 즉시 베를린행 기차를 탈 수 있도록 돈까지 아우크스부르크로 부쳐주는 등 그가 작가로 베를린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친구로서 정성을 다했다. 브레히트는 이 돈을 화가인 친구 카스파 Caspar Neher가 물감을 사도록 주었다고 한다. 물론 카스파는 헤다에게 스케치와 그림으로 후일에 답례한다. 이들은 이렇게 서로가 작가로서, 화가로서 성공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좋은 우정을 가진 친구들이었다. 


    출산 후에 겨울을 나고 새해가 되자, "Bi"도 다시 아우크스부르크로 되돌아왔고 기차만 타면 뮌헨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하지만, 브레히트와 떨어져 사는 것이 견딜 수 없어 베를린 여행에서 1920년 3월 14일 뮌헨으로 돌아오자마자, "Bi"는 바로 뮌헨에 사는 아주머니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이로써 브레히트를 싫어하는 부모님 곁을 떠나 만나고 싶을 때 마음대로 만날 수 있게 되었고, 뮌헨에서 브레히트와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비록 갓 난 아들과는 떨어졌지만, “Bi"는 브레히트 가까이, 자타가 인정하는 '브레히트의 부인'으로 브레히트 창작과 연극작업은 물론 그 당시 뮌헨에서 활동하던 영화제작자인 칼 발렌틴 Karl Valentin, 뮌헨 문단을 이끌고 있던 포이히트방어 Lion Feuchtwanger, 뮌헨 캄머스필의 연출가 팔켄베르크를 위시하여 여배우 베르그너 Elisabeth Bergner 등 수많은 저명 예술가와 문인들과 접촉하고 만나는 모든 일에 함께 한다. 그야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부족한 것이라고는 없는 매혹적인 시간을 뮌헨에서 보내게 되었다.


1919년 아우크스부르크 극장에 데뷔한 마리안네 쪼프



    그런데, 이 꿈과 같은 열렬한 사랑에 끼어든 사람은 뮌헨 학창 시절 브레히트의 여자 친구로 자주 언급되는 헤다 쿤 Hedda Kuhn이 아니라, 마리안네 쪼프 Marianne Zoff이다. 마리안네는 1919년 9월 21일부터 아우크스부르크 시립극장에서 오페라 "카르멘"에 집시 소녀로 데뷔한 오페라 가수였다.

    브레히트가 이 당시 아우크스부르크 신문에 날카로운 연극비평을 쓰고 있었고, 마리안네 오빠가 뮌헨 캄머스필에서 희곡전문가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서로 알게 되었다. 1919년 11월 23일 공연에서 브레히트는 마리안네가 무대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던 것 같다. 마리안네가 집시소녀로 데뷔를 성공한 이후 아우크스부르크 극장에서 다양한 역에 출연했고, 브레히트도 아우크스부르크 신문들에 연극 비평을 계속 쓰던 1920년 12월경에 마리안네 분장실을 찾아가서 더 깊이 남녀로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Bi"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고, 브레히트 몰래 다른 남자와 "춤추는 일"로 반항을 시도해 보다가, "Bi"는 브레히트의 영향권을 떠나 거리를 두기 위해 뉘른베르크에 보모 자리를 얻어 1921년 6월 19일 뮌헨을 떠난다. 이를 계기로 둘 사이에 사랑은 금이 가기 시작했고 "Bi", 브레히트 그리고 마리안네 사이에 사랑 싸움인 삼각관계가 시작된다.



(2014년 겨울 - 계속 연재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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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히트가 1922년 "클라이스트 문학상" 상금으로 10000마르크를 받았다. 그런데, 그 당시 1922년 11월 10일자 환율로 계산하면 132, 35 USD인데, 이것으로 학생 브레히트의 가난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브레히트가 그 와중에도 아들 양육비를 꼬박꼬박 책임지는 아버지의 의무를 다한 것은 간단한 일만은 아니았던 것 같다.


배경 음악은 Milva의 "Ich bin der Mensch, der dich lieb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