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B. Brecht/쉽게 쓴 브레히트

이해(오해)하기 어려운(쉬운) 브레히트 사랑 - IV

그리스도의 편지 2014. 11. 25. 21:21





이해(오해)하기 어려운(쉬운) 브레히트 사랑
- 세 연인으로부터 세 아이 아빠된 26살박이 브레히트 사랑
 
 
 



브레히트와 "Bi" (1918/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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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중의 아기, 

브레히트 자식이 자라도록 둬라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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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결실, 그 댓가와 책임



    시대를 초월해서 처녀성을 잃는 첫 관계는 특히 여성 자신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 사회, 그것도 카톨릭 신자인 “Bi"에게는 브레히트와 함께한 사랑의 기쁨만큼이나 분명한 죄의식이 그녀의 마음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분명한 변화는 이 순간부터 브레히트에게 훨씬 더 사랑이 깊어지게 되었고, 브레히트는 늘 "Bi"를 꼬옥 손에 잡고 다니는 아름다운 사랑의 여름이 시작되었다. 

    뮌헨에서 되돌아 오자마자, '햄스터를 보러 시골에 갔다 온 줄' 알고 있었던 “Bi"의 부모는 '첫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한 딸의 모습'에서 휴양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에 즉시 딸을 스타른베르크 호수로 2주간 휴양을 보낸다. 물론 이 기회가 금방 사랑에 빠진 두 젊은 연인들에게는 함께 할 절호의 찬스이기도 했다.




호숫가에 위치한 베르크 성 (겨울 풍경)


    이곳은 한국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 노이쉬반스타인 성을 지은 바이에른왕인 루드비히 2세가 폐위되어 거하다가 의문사한 곳이다. 브레히트와 "Bi"는 이틀 동안 루드비히 2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베르크 성으로 가서 마음껏 사랑을 나눈다. 후일 "Bi"는 "이곳에서 브레히트와 함께 사랑한 일이 너무나도 행복했었고, 동시에 '전혀 자신의 이상형이 아니었던 이 남자가 왜 자신을 그렇게 황홀하게 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주의 깊게 관찰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하지만 "Bi"는 자기 의지로 선택했던 남자와 반평생을 결혼해서 살았음에도, 브레히트가 죽고 난 뒤 1980년 즈음에 브레히트와의 관계에 대해 공식적으로 입을 열게 될 때까지도 확실한 답을 찾아내지 못한다.
    이 여행에서 브레히트는 "Bi"를 영육간에 온전히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으로 변하게 되도록 시도한다. "Bi"의 자의식이 강해질 때까지, 브레히트는 자신의 철학과 인생관을 마치 반죽을 주물러 조각을 하듯이 "Bi"의 삶과 영혼을 자신의 교육으로 변화시키고자 시도한다. 이틀간에 둘 사이에 있었던 수없는 대화는 "첫 경험"으로 충격을 받았던 "Bi"에게 휴양의 절정이자 끝이 되었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나아갈 여정이 활짝 열리게 된다.

     그런데, 두 사람의 뜨거운 사랑에 큰 장애물이 찾아오게 된다. 브레히트는 1918년 7월 22일자에 친구 네어 Caspar Neh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얼마 전에 Bi와 밤낮으로 함께 스타른베르크 호수에 있었고, Bi는 3일 동안 백작 부인이었다가 달거리가 멈춘 관계로 심히 두려워했다" (GBA 28, 61)고 적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일은 1차 세계전쟁이 끝나갈 즈음인 10월에 찾아오게 된다.
    아기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Bi"의 추측은 곧 현실이 되었고, 이 사실을 "Bi"는 브레히트에게 즉시 알린다. 그러자, 브레히트는 단 한마디 비난도 없이 전적으로 "Bi"를 도울 것이라고 약속하며, "태중에 아기, 브레히트 자식이 자라도록 둬라"고 말한다. 두 사람의 사랑 안으로 졸지에 찾아든 아기 손님 때문에, 브레히트는 즉시 "Bi"의 아버지를 찾아간다. 물론 브레히트는 자신에 대한 "Bi" 아버지의 적대심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이런 일로 찾아온 자신에게 돌아올 수모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히트는 그녀의 아버지 앞에서 "모든 책임을 자기 혼자만 질 것이니 딸에게 조금도 비난하지 말아 달라"고 계속 반복해서 부탁한다.
    하지만, 두 남자 사이에 대화는 아무런 성과도 가져오지 못한다. 브레히트가 "Bi"와 결혼하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브레히트와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브레히트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책임을 딸에게 묻고자 했으며, 브레히트는 이런 그녀의 아버지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브레히트와 Bi (1918년)



    "Bi"의 아버지는 흔히들 딸을 가진 '못난 아버지들'이 하는 것처럼, 사랑에 빠진 당사자들에게 부정적으로 결정을 신속하게 내린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아버지와 가문의 위신을 위해서 'Bi'가 고향 아우크스부르크를 떠나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서 출산한다"는 결정이었다. 의사인 아버지는 작가가 되려는 브레히트, 딸이 사랑하는 남자를 이해하고 사위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에게 대한 막연한 적대심을 구체적인 증오심으로 발전시켰고 딸의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권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렇게 내린 결론은 임신 3개월에 접어든 "Bi"를 1919년 1월, 하늘이 은빛 비단과도 같았던 추운 겨울날에 단 한 푼의 지원도 없이 딸을 알고이 지역에 있는 산골 동네 킴라츠호펜으로 내쫓았던 것이다. 임신으로 인한 아버지의 추방으로 뮌헨 대학에서 공부하는 브레히트와 알고이 지역 산골에 감금된 "Bi"와의 관계가 시간상 거리상으로 엄청 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고, 브레히트는 강의와 뮌헨 극장, 자신의 작품 활동 등으로 시간이 나지 않으면 빈 편지지에다 자신의 이름만 적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것으로 자신이 "Bi"를 잊지 않고 사랑하고 있는 마음을 전했던 것이다.
    물론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부유한 의사인 아버지로부터 단 한 푼도 지원받지 못하는 "Bi"의 생활비와 체재비를 위해 브레히트가 최대한 절약하는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Bi"의 회고에 따르면, 브레히트는 당시에 가장 저렴했던 "빵과 사탕무우잼"만으로 연명했으며, 주말마다 한번씩 방문하면서 캠프텐까지는 뮌헨에서 기차로 와서 킴라츠호펜까지 6시간 눈길을 걸어 버스비를 절약해 "Bi"의 출산 준비와 태어날 아기를 도왔다"고 한다.
     



아들 프랑크의 유아세례식 파티에 모인 친구들 (1919년 8월 2일)


    경제적 어려움과 부모로부터 고향에서 추방을 당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변하지 않는 사랑과 애정으로 1919년 7월 30일, 브레히트의 아들 프랑크는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브레히트는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된 것을 기쁜 맘으로 알렸고, 그 당시 브레히트가 존경했던 작가 프랑크 베데킨트 Frank Wedekind의 이름을 따서 아들 이름을 프랑크**라 불렀다. 

    브레히트는 개신교이고 "Bi"는 카톨릭이었지만, 8월 2일 카톨릭 식으로 아들에게 세례를 받도록 한다. 이때 대부로 선 사람이 후일 유명 의사가 되는 오토와 유명한 무대장치가인 카스파이다. 아들 세례식을 치른 뒤, 어려운 형편에도 거창한 세례 축하 파티를 한다. 이 파티에서 받은 감동과 영감이 후일 "소시민의 결혼"이란 작품 속으로 그대로 녹아나게 된다.

    아들의 출생으로 브레히트의 심장을 짓누르던 바위가 치워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었고 사랑의 시련은 이들에게 계속된다. 아이까지 가진 두 젊은 연인은 그 당시에 사회적 관습과 이념에 따라야 했으며, 특히 "Bi"의 아버지 체면과 가문을 위해 젊은 아버지, 엄마 그리고 갓 태어난 아들이 떨어져 살아야만 했었다. 사랑한 당사자는 정작 아무런 죄가 없었지만, 사랑을 지켜본 제3자들은 자기들 위치와 가치관 편에 서서 기꺼이 가하고자 했던 징벌이 이들의 사랑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온 것이었다.



(2014년 겨울 - 계속 연재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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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히트 첫아들의 이름과 관련하여 또 한 여인의 이름을 짧게 소개하고자 한다. "개 눈에는 똥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속담과 걸맞을 정도로 선정적인 문학자들이 "브레히트가 'Bi'를 사귀는 시기에 동시에 사귄 여성"으로 즐겨 내세우는 헤다 Hedda Kuhn란 의대생이다. 브레히트의 대학 첫학기인 1917/18년 겨울 학기에, 쿠처 Kutscher교수의 "문학비평과 연극비평"이란 주 4시간짜리 강의에서 서로 알게되었다. 물론 둘이서 동료 학생으로 아주 친하게 지냈고 헤다가 아우쿠스부르크에 방문해서 브레히트 부모는 물론 "Bi"까지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브레히트가 각종 글에서 다른 남자 친구들처럼 언급하고 있기에 연인으로 종종 과장하여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대상이 된다. 하지만, 헤다는 뮌헨 의대를 같이 다니고 친하게 지냈으며 문학적으로 교류하면서 특히 뮌헨 연극무대와 관계를 맺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던 친한 동료 (Freundin이 아니라 Kumpel)일 뿐이다. 헤다가 뮌헨 극장들과 관계가 좋았으므로 "Bi"가 뮌헨을 방문하면 공짜 극장표를 구해주거나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좋은 친구였다. 그 일례로 연극비평 강의해서 둘다 베데킨트를 아주 좋아한 결과로 "우리가 각기 첫 아들을 낳으면 베드킨트에 따라서 '프랑크'라고 부르자"고 한 약속을 브레히트가 먼저 이행했던 것이다. 물론, 헤다도 후일 첫아들을 낳자 브레히트와 약속한 대로 아들 이름을 프랑크라고 부르고 세례를 받게 한다.

    이러한 브레히트와 헤다의 관계는 브레히트가 베를린 출판업계와 연극무대에 발판을 잡고자 뮌헨과 베를린을 오가던 시기인 1920 - 1922년까지도 지속된다. 무엇보다도 남녀관계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정도의 교류는 없었다. 베를린 병원에 의사로 근무하던 약혼자가 "우정으로 브레히트를 도와주도록은 했지만, 남녀 관계로 의심을 받지 않도록" 헤다의 처신을 사전에 관리했었다. 어찌했건, 브레히트는 1920년 일기에서 "'Bi'를 사랑하지만, 헤다를 사랑하지 않는다" (GBA 26, 122)고 확실히 밝혔음을 적고 있다.


배경 음악은 Omar Akram의 "You Are Loved!"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