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B. Brecht/쉽게 쓴 브레히트

이해(오해)하기 어려운(쉬운) 브레히트 사랑 - I

그리스도의 편지 2018. 1. 28. 06:00





이해(오해)하기 어려운(쉬운) 브레히트 사랑
- 세 연인으로부터 세 아이 아빠된 26살박이 브레히트 사랑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 -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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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중의 아기, 

브레히트 자식이 자라도록 둬라

 

(브레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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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간 독자들의 인기 편승이나 추문 위주의 저널리즘에 편승한 소위 '문학자'란 사람들이 이미 세상에다 내질러 둔 글들로 인해서, 본 글의 제목만 보고서도 독일의 위대한 작가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1956년)의 작품세계 자체보다는 작가의 사생활에 솔깃해져서 본고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이런 류의 대표적인 책이 1994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John Fuegi,『Brecht & Co.』 (New York 1994)"이다. 이 책이 출간되자말자, 필자는 "청교도적 안목으로 쓴 외설적인 브레히트 전기" (1994년, 괴팅겐/칼스루에)란 서평에서 "특별나게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을 너무 외설적으로 치우친 브레히트의 전기"라고 평한 적이 있다. 독일 연극 전문 잡지인 "Theater heute"가 "이 책만큼 관심을 끈 책도 없고, 또 이제까지 독일에서 이 책만큼 강한 거부감을 받은 책도 없다"한 것처럼, 이 외설적 전기는 그간 비슷한 성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수없이 재인용되었고, 한국에서도 이 책의 내용들이 심지어 진리탐구의 장인 대학 "문학강좌"에서 '사실아닌 사실'들을 그대로 옮기는 것도 부족해 더 한층 진실 아닌 내용들을 추가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말에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이 있듯이, 이 말은 “남녀의 사랑은 주관적일 수 밖에 없으며, 판단의 주체에 따라 로맨스일 수도 있고 불륜일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자, "남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무조건 '불륜'이라는 도덕적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 될 것이다. 혹시라도 작가 브레히트의 '불륜'이나 이해하기 힘든 사생활에 관심이 있어, 본 글에 관심을 가진다면,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배우들의 염문설을 주로 다룬 외설 잡지나 그런 글이 많이 올라오는 사이트의 글들을 권하고 싶다.


    일반 독자가 쉽게 현혹되기도 할 본 글의 제목에 따라 "이해(오해)하기 어려운(쉬운) 브레히트의 사랑"을 1916년 "마리 A."와 첫 번째 입맞춤에 대한 경험에서 1925년 세 아이의 아빠가 될 때까지, 세 여성을 마치 한 여성처럼 사랑했던 젊은 작가 "브레히트"가 어떻게 사랑했고, 또 어떻게 그 사랑의 결과에 대해 행동했는지를 그대로 기술해 봄으로써, 독일의 위대한 작가 브레히트의 사랑을 '오해에서 삼해를 뺀 이해'의 눈으로 유도해 보고자 한다. 계속 읽기를 작정한 사람들은 브레히트에게 오해의 화살을 보내기 전에, "자기 자신의 사랑을 우선 돌아보라!" 그리고, 본인의 가치척도인 "기존의 도덕관을 우선 내려 놓으라"고 권하고 싶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난 뒤에도 작가 브레히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만큼, 자기 자신의 사랑이 브레히트의 사랑보다 더 진실되고 숭고하다면 기꺼이 돌을 던질 것을 권한다.


    브레히트가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될 때까지 브레히트의 연인으로 세 여인들 - 브레히트가 평생 사랑했던 "Bi"란 애칭을 가진 파울라 반홀츠 Paula Bahnholz, 오페라 가수였던 마리안네 쪼프 Marianne Zoff 그리고 당시 베를린 연극무대에서 유명했던 여배우 헬레네 봐이겔 Helene Weigel이 등장한다. 1924년, 26살인 청년 브레히트는 이 세 여인들로부터 각각 아이를 얻어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1919년 7월 30일 "Bi"로부터 첫아들 프랑크 Frank Bahnholz를 얻어 21살에 아버지가 되었고, 1922년 11월 3일에 임신으로 결혼하게 된 마리안네로부터 1923년 3월 12일에 딸 한네 Hanne Hiob를 그리고 1924년 11월 3일 봐이겔이 아들 스테판 Steffen Brecht을 낳음으로써 2남 1녀를 가진 아버지가 되었다. 아들이 나던 달에 브레히트 교육극 연작 시리즈를 공동작업했던 새로운 여인,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Elisabeth Hauptmann을 처음 알게 된다.

    물론 이 시기에 단순히 세 아이의 아빠가 된 것만이 아니라, 젊은 문제작가 브레히트는 독일에서 주목받는 유명한 작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1922년 11월 13일에 “클라이스트 문학상”을 받았고 자신의 희곡 작품이 인쇄되어 출판되는 것은 물론이고 뮌헨과 베를린 무대와 독일 각 극장에서 무대에 오르고 성공을 거두었다.


    흔히 저널리즘에 편승한 문학자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브레히트가 이 세 여인을 ‘섹스로 사로잡고 정복하여 이용한 마초 타입’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브레히트 자신이 선천적으로 심장 결손을 가지고 태어났고 "Bi"를 달음박질로 뒤따라 잡을 체력조차도 없을 정도로 육체적으로 나약한 남성이었으며, 세 여인들이 한결같이 '남성으로서 외적인 매력이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세 여인들에게서 브레히트가 공통적으로 추구한 것을 보면 모두가 여성으로서 기존 사회 관습에서 자유로워진 배우로서의 여인 그리고 후일 자신의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 주연 배우로 여인을 염두에 둔 것이다. 왜냐하면, 의사의 딸로 독일 전형적인 시민적 가정에서 자란 아직 여리고 순진한 "Bi"에게 브레히트가 끝없이 기본 관습에서 해방된 여성관을 주입시켰고 그녀를 여배우로 성공시키고자 수없이 시도했기 때문이다. 오페라 가수인 마리안네가 브레히트를 만나게 된 것도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뒤 탈의실에서 휴식을 하고 있는 자신을 찾아온 아우크스부르크 극장이다. 봐이겔은 물론 "드라마 작가로 성공하기 위해서 유명한 여배우가 필요하다"고 작심하고 베를린으로 주활동 무대를 옮겼던 브레히트에게 그 당시에 베를린에서 명성을 떨치며 잘 알려져 있었던 아주 '이상적 여인상'인 여배우라 하겠다.


고향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브레히트,  1916년


    물론 여인들은 첫눈에는 남성미는 물론이고 옷차림을 그다지 중요치 않게 여겼던 브레히트가 걸친 비루한 모습에서 호감을 별로 가지지 못했지만, 쉴 사이 없이 이어지는 그의 말들에서 작가 지망생의 해박한 지식과 비범한 능력에 경탄을 보내며 경청하다가 브레히트를 사랑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이들 세 여인 모두와 하나같이 사랑에 빠졌고 그 결실인 자식까지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미 성인이었던 쪼프와 봐이겔과의 사귐과는 달리, 브레히트와 "Bi" 사이의 사랑은 처음 시작부터 두 남녀에게 시련을 미리 전제한 사랑이었다. 왜냐하면, 의사였던 "Bi"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작가 지망생인 브레히트를 아예 아직 어린 딸의 남자 친구로 인사를 받기조차도 거부했기 때문이다. “Bi" 부모들의 이런 완강한 거부감 때문에, 브레히트가 "Bi"와의 사랑과 결혼할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 맘에도 없는 "뮌헨 대학 의과대와 철학부에 등록해 공부하는 척”이라도 한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2014년 겨울  - 클릭 (다음글에 계속 이어짐



배경 음악은 Omar Akram의 "A day with you"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