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B. Brecht/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레히트 그늘에서 걸어나온 스테핀

그리스도의 편지 2014. 10. 24. 00:03






마르가레테 스테핀이 뒤 늦게 도로 찾은 영광
스테핀 유고집 - 『공자는 여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베를린 1991)
 
 
 


소위 서평이라 함은

독자들에게 무엇보다도 독서의 충동을

문학 이론가들에게 연구의 욕구를

비평가들에게 비평의 칼날을,

그리고 저자에게는

보다 알찬 내용을 주문하는 데 있다.

또, 아무런 욕구도 없는 자들에게는 

최소한의 눈요기라도 줄 때

그 역할을 다한다.


(KMJ,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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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테핀이 모스크바에서 결핵으로 33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은 지 꼭 50년 후인 1991년 스테핀의 유고집이 출간되었다. 그 동안 브레히트 작품의 그늘에서 가려져 있었고,  수 십 여년간 베를린의『Bertolt- Brecht-Archiv』(이하 BBA로 약칭)에서 엄격한 보호 속에 감춰져 있었던, 스테핀의 작품들이 마침내 한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스테핀의 유고집은 겔레르트 Inge Gellert의 편저 아래『공자는 전혀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Konfutse versteht nichts von Frauen』라는 제목으로 베를린에 있는 로볼트 출판사에서 1991년 마침내 간행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스테핀이 죽은 후, 스테핀의 원고들을 오스텐 Maria Osten과 아프레틴 Michail Apletin이 받아서 보관했었다. 이것이 일부는 아직 모스크바의 중앙 시립 문학․예술 문서 보관소 (Zentrales Staatliches Archiv für Literatur und Kunst der UdSSR in Moskau, ZGALI)에 소장되어 있고, 일부는 우제 Bodo Uhse가 1961년에 BBA로 가져왔었다. 모스크바에서 BBA에 도착한 스테핀의 작업메모는 수많은 브레히트 연구가들에게 브레히트 작품들의 정확한 창작 연도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하지만, 유명한 브레히트의 한 여자 정도로만 단순히 취급했을 뿐, 이 스테핀의 작품 원고는 BBA의 보호 속에 이제까지 연구가 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BBA나 출판계에서 스테핀의 유고집 출판을 거의 “금기”로 여겨왔었던 것이 새로 시작된 브레히트 전집(GBA)의 발간작업 중에 한권의 유고집으로 묶여졌다는 것에 무엇보다도 그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유고집에는 스테핀의 16개 단편, 어린이들을 위한 12 편의 이야기, 6편의 전기물, 어린이 희곡과 수많은 시와 편지들 그리고 많은 관련된 자료들로 편집되었다.

 



브레히트와 스테핀 (덴마크, 1934)

 


   이 유고집은 때늦은 감이 있지만, 전쟁 중에 폐결핵이란 병을 안고 오로지 브레히트 문학을 위해서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정열을 다했던 스테핀에게 보내는 작은 정성일 것이다. 왜냐하면 스테핀이 폐병에 사로잡힌 육신을 이끌고도 죽을 힘을 다해서 브레히트의 창작에 공동작업자로서 자신의 남은 정열을 다 쏟았을 뿐만아니라, 죽음을 앞두고도 “브레히트가 자신의 창작을 위해서 그녀가 없어서는 안된다”는 의미 하나만으로도 기쁘게 죽을 수 있었던 스테핀은 브레히트의 문학 속에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쏟아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브레히트에게서 "스테핀 죽음의 의미"는 브레히트가 그녀의 죽음과 연관해서『나의 공동작업자 MS의 죽음 뒤에』라는 아래 시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나의 장군은 전사했고 

나의 군인도 전사했다. 


나의 제자는 떠나 가버렸고

나의 스승도 떠나 가버렸다.

 

나의 후견인도 없어졌고 

나의 양자도 없어져 버렸다. (GBA 15, 45)


 

   위의 시에서 브레히트는 아무런 꾸밈없이 스테핀의 죽음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최대한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스테핀은 히틀러의 독재와 억압하는 모든 파시즘과 대항하여 싸웠던 브레히트 문학의 지휘 장군이자 훌륭한 군인이었으며, 브레히트의 제자이자 동시에 스승이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창작활동을 묵묵히 지원하는 후견인이자, 브레히트가 애지중지 전쟁에서 꼭 보호하고 구출해내고자 했던 수양딸이었다


    스테핀의 불과 같은 정열과 뛰어난 재능은 굶주림, 추위 그리고 폐결핵 앞에서 결국은 굴복하고 만다. 스테핀이 17살, 28살 때, 어느 점성술사가 '스테핀이 32살의 나이로 죽을 것'이란 말을 듣고도 전쟁과 굶주림, 자신의 신병에도 굴복하지 않고 묵묵히 창작에 전념했다. 하지만, 스웨덴 핀란드에서의 망명생활이 추위와 기근은 물론 더 이상 치료의 기회를 갖지 못하자, 스테핀은 30살이 되면서 스스로 “나는 33살의 나이로 죽을 것이다. 아마 나는 단지 쓰레기로 남을 것이다”라고 전쟁이 끝나기 전에 자신이 죽음의 사자의 포로가 될 것이라고 표명하게 된다




브레히트와 스테핀 (스웨덴, 1941년 2월)



    브레히트가 미국의 헐리우드에 정착한 후인 1941년 8월 1일『작업일지』에다 “집은 너무나 아름답고, 여기서 나의 직업은 벼락부자들이 슬럼가에서 주먹만한 금덩이들을 채취하는 것과 같은 금 채굴업 그것이다. [...] 그런데 여기에 막상 그레테(스테핀)가 빠졌다. 이것은 사막으로 들어가는 중에 막 사람들이 나에게서 인도자를 빼앗아 간 것이나 다름이 없다” 
(GBA 27, 10) 고 적고 있는 것 처럼, 브레히트의 덴마크, 스웨덴 그리고 핀란드 망명 중의 창작활동은 스테핀 없이는 거의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미국 망명동안 브레히트가 스테핀이 없는 문학활동에 관해서 그의 작업일지나 시(詩)에서 충분히 언급하고 있다.


    물론 브레히트 자신도 망명에서 돌아오자마자 이러한 스테핀의 업적을 기리고자 했었다. 즉 아이들을 위한 스테핀의 교훈극『그가 천사를 가졌더라면 Wenn er einen Engel hätte』이란 작품을 베를린에서 공연하고자 시도한 사실이 그것이다. 하지만, 스테핀의 원고가 모스크바에서 베를린 BBA로 되돌아 왔을 때, 이미 브레히트는 고인이 되고난 뒤 였다. 그 이후 이 원고들은 BBA에서 엄격한 보호하에 손이 닿치않은 채로 이제까지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겨우 80년대 들어서야 겨우 동베를린 극장들이 스테핀을 기리기 위해서 공연을 할 수 가 있었다. 



    브레히트의 명성 뒤에 감춰져 있었던 스테핀의 문학성은 이 유고집을 통해서 충분히 판단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서 브레히트의 작품세계에 끼친 영향을 충분히 짐작할 수 가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미 브레히트나 스테핀이 고인이 되었고, 우리가 단지 브레히트의 작품으로 대하고 있는 지금 새로 출간되는 신전집(GBA)에서 공동작업자 영역이외에서 스테핀의 작품세계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이 공동작업할 당시의 작업과정은 원고 중에 브레히트에게서 어떤 부분이, 또 반대로 스테핀에서 어떤 부분이 유래한 것인지를 둘 사이에는 적어도 분명했을 것이다. 또 이런 창작과정을 이들이 공동작업으로 생각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브레히트 이름하에 공동작업자로 기꺼이 남았고, 이 작업의 성공이 또한 그들의 공동적인 성공으로 간주되었다. 나아가서 작품의 출판은 당연히 이미 이름이 잘 알려진 브레히트 저작권만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뒤늦게나마 발간된 유고집은 이제까지 브레히트 문학속에 완전히 녹아든 스테핀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게하는 좋은 자료 중에 하나다. 이것으로써 그나마 브레히트의 명성뒤에 단지 폐결핵 환자로써, 연인으로써 그리고 공동작업자로 그늘에 가려있었던 스테핀의 작가로서의 위치가 재확인되었다. (1991년 가을에)

 

 

 

배경 음악은 Tom Barabas의 "Moon Dus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