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B. Brecht/브레히트와 BCI2000

브레히트와 스테핀, 그 열정적 관계

그리스도의 편지 2014. 10. 23. 00:03





브레히트와 스테핀, 그 열정적 관계
- 사막에서 안내자 앗긴 브레히트
 
 
 

 


나의 장군은 전사했고 

나의 군인도 전사했다. 


나의 제자는 떠나 가버렸고

나의 스승도 떠나 가버렸다.

 

나의 후견인도 없어졌고 

나의 양자도 없어져 버렸다. 


(『나의 공동작업자 MS의 죽음 뒤에』GBA 15, 45)


************

       


    브레히트의 전집을 뒤지다 보면 브레히트 자신의 이름 다음으로 자주 대하는 세 여자들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이 다름아닌 엘리자베트 하우프트만 Elisabeth Hauptmann, 마르가레테 스테핀 Margarete Steffin 그리고 룻 베를라우 Ruth Berlau이다. 이들은 브레히트의 공동 작업자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연인으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이들 중에서 하우프트만이나 베를라우는 브레히트 사후까지 살아서 브레히트가 작가로서 성공은 물론 그의 작품들이 무대에 공연되어 전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스테핀은 히틀러에게 초를 다투며 쫓기다가 전쟁 와중인 1941년 모스크바의 결핵병동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브레히트와 스테핀 (덴마크, 1934)


    하우프트만은 주르캄프 출판사가 1967년『브레히트 전집』(GW)을 펴낼 때, 편집을 담당함으로써 브레히트의 이름이 인쇄되는 곳마다 자신의 이름이 인쇄되는 영광을 차지했었고, 이로써 비록 자신이 공동 작업자로서 브레히트 사후 그녀의 힘으로 원고들이 하나의『전집』으로 나오게 하는 영광을 그녀는 차지했다. 나아가서 1977년 자신의 작품과 회고집을 펴냄으로써 브레히트 그늘 밖의 한 작가로서의 영역을 인정받았다.




20대 브레히트와 하우프트만 (베를린, 1927)


    베를라우는 망명에서 되돌와 온 후 50년대 베를린에서 브레히트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꾸준하게『Bertolt-Brecht-Archiv』(이하 BBA로 약칭)의 설립을 준비하여, 브레히트 사후 곧바로인 1956년 10월에 이미 그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곳에 있는 많은 자료를 접할 때, 특히 공연자료나 필사본을 접할 때 이러한 자료들을 일일이 촬영하고 보관․정리한 베를라우의 선견지명은 생전은 물론, 영원히 그녀에게 돌아갈 영광이고 업적이다. 하우프트만과 마찬가지로 베를라우 역시 1985년에 그녀의『회고록』을 펴냄으로써 브레히트의 창작활동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브레히트와 베를라우 (덴마크, 1935)


   스테핀은 폐결핵을 앓고 있었고, 게다가 덴마아크, 스웨덴, 핀란드 그리고 모스크바에 이르기까지 망명이라는 물적, 정신적으로 최악의 조건하에서도 브레히트의 창작활동을 도왔다. 그녀의 공동작업의 도움으로, 브레히트의 거의 모든 중요한 걸작품들이 이 기간동안에 완성될 수가 있었다.


    이것은 브레히트가 미국으로 망명을 결정하고 나서 비자를 받고자 시도할 때 항상 “스테핀을 동반하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다. 이런 사실은 브레히트가 피스카토르 Erwin Piscator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엇보다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실제로 스테핀 혼자만이 나의 수 천장의 원고들을 꿰뚫어 보고 있다네. 그녀 없이 강의를 한다는 것은 단지 수많은 시간의 소비를 의미하지. 스테핀이『둥근 머리와 뾰쪽 머리』,『카라르 부인의 무기』그리고『호라티인들과 쿠리아티인들』란 작품들의 그녀가 공동작업자로 기재된「전집」을 너는 제시할 수가 있겠지. 그 외에도 그녀는 『제 3 제국의 공포와 참상』,『갈릴레이의 생애』그리고『억척어멈과 그 자식들』등의 작품들도 공동작업을 했지. 그리고 그녀가『이론서』들도 공동작업을 했다는 것을 자네도 말할 수 있지 않겠어. 나는 스테핀을 단순히 여기에 남겨 둘 수가 없어. 그녀는 10 년전부터 나의 가장 긴밀한 공동 작업자이고 인간적으로 나와 각별한 관계이지. (GBA 29, 172,  Nr. 923)



   위의 편지에서 브레히트가 스테핀의 미국행 비자를 받아내기 위해서 피스카토르에게 부탁조로 편지를 쓰고 있지만, 브레히트는 자신에게 있어서 스테핀의 존재는 '그의 작품활동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 단순히 결별할 수 없는 존재'라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스테핀이 쓰여진 브레히트의 원고들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창작을 위해서도 스테핀의 존재는 브레히트를 위해서는 그야말로 “사막(새로운 창작)의 인도자”와도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어렵게 얻어낸 미국행 비자와 배표를 손에 쥐고서도 시베리아 급행열차를 타기 직전에 애석하게도 ‘폐결핵의 포로’가 되어 모스크바 결핵병동에 갇히게 된다. 더욱 애석한 것은 히틀러의 군대가 초를 다투어 그들을 뒤쫓고 있을 때, 그녀의 폐결핵은 모스크바의 차디찬 동토에다 33살의 젊은 그녀를 사장시키고 말았다. 

   그녀가 죽기 이틀전 사랑했던 연인이자, 공동작업자요 그리고 동지였던 브레히트는 시베리아 특별열차가 출발하기 4 시간 전에 작별 인사를 하러 갔었다. 이때, 스테핀은 “내가 뒤따라 가마, 단지 죽음과 전쟁만이 나를 방해할 수 있겠지”란 말과 조용한 미소로 브레히트와 영원한 작별을 했었다. 이로써 스테핀은 이 세상과 명을 달리했고, 브레히트는 그의 유능한 공동 작업자를 잃고 사막인 미국땅에 정착하게 된다.




마르가레테 스테핀, 1931



   그런데 브레히트 전 작품을 개괄하여 보면, 스테핀 사후인 1941년부터 미국 망명생활, 베를린으로 귀국한 후인 1948년부터 브레히트가 사망한 해인 1956년까지 그의 창작활동에 비해 스테핀과 함께 공동작업을 했던 1933년에서 1941년 사이의 창작활동이 훨씬 왕성했고, 또 많은 중요한 작품과 이론들이 이 시기에 완성된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스테핀과의 공동작업 당시와 비교해 볼 때, 작품 활동의 여건이 훨씬 좋았던 ‘미국에서의 망명시와 50년대 베를린으로 귀국 후의 창작활동이 왜 그리 활발하지 못했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물론 창작이외의 다른 문제로 자신의 창작력을 소모하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런데, 정작 원숙해진 그가 미국 망명 동안이나 베를린 복귀 이후 훨씬 많은 원숙한 작품들을 창작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망명 중에 완성된 작품들을 무대공연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자기의 연극이론을 입증한다든가 또는『베를린 앙상블』의 공연을 위해서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을 번안한 것이외에는 두드러진 이론서나 작품들을 그리 많이 집필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자신의 창작활동과 관계된 중요한 단서를 미국의 헐리우드에 정착한 후인 1941년 8월 1일『작업일지』에다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집은 너무나 아름답고, 여기서 나의 직업은 벼락부자들이 슬럼가에서 주먹만한 금덩이들을 채취하는 것과 같은 금 채굴업 그것이다. [...] 그런데 여기에 막상 그레테(스테핀)가 빠졌다. 이것은 사막으로 들어가는 중에 막 사람들이 나에게서 인도자를 빼앗아 간 것이나 다름이 없다. (GBA 27, 10)


    브레히트가 미국, 그것도 헐리우드에서의 망명생활이 작가인 자신에게는 금채굴업자와도 같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공동작업자인 스테핀이 없는 자신을 “사막에 들어가면서 막 인도자를 빼앗긴 여행자”로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자신의 창작활동에 스테핀은 절대 필요한 존재였었다.


   스테핀이 죽은 후에 그녀의 원고들을 오스텐 Maria Osten과 아프레틴 Michail Apletin이 받아서 보관했던 것을 일부는 아직 모스크바의 중앙 시립 문학․예술 문서 보관소 (Zentrales Staatliches Archiv für Literatur und Kunst der UdSSR in Moskau, ZGALI)에 소장되어 있고, 일부는 1961년에 베를린 브레히트 아히브로 우제 Bodo Uhse가 가져왔었다.

   하지만, 스테핀의 유고는 수십년 동안 BBA에서 엄격하게 보호된 채로 남아 있던 것을, 스테핀 사후 50년 뒤인 1991년에야 마침내 스테핀의 유고집『공자는 여자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를 못한다 (Konfutse versteht nichts von Frauen)』란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유고집 이후 “스테핀과 브레히트”의 관계는 브레히트 연구에서 많은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다. 작품창작 과정에서 이들 둘간의 공동작업한 창작 열정을 - 스테핀이 짧게 10 년동안 폐결핵 환자일 수 밖에 없는 자신의 혼신의 힘을 다해 모든 것을 불태움으로써, 어려운 망명 생활중에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된 연인이자 동지였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브레히트의 창작을 도운 것만 아니라 실제로 함께 창작했던 좋은 안내자 스테핀을 기억하기 위해서, 브레히트 연구자들에게 원문 텍스트를 찾아나서는데 안내자가 되고자 1988년부터 작업에 착수하면서 "브레히트 컴퓨트 인덱스 2000" (BCI2000)을 굳이 그 이름을 "마르가레테 스테핀 프로젝트 Margarete Steffin Projekt"로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경 음악은 Tom Barabas 의 "Adagio"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