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김질편지/창세기

하나님을 당황하게 했던 자기헌신

그리스도의 편지 2008. 4. 18. 01:34




향기로운 자기 헌신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창 22,   12)


    어떤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일까? 우리의 미래를 누구에게 약속해야만 할까? 우리 가운데서 "우리의 미래는 자식이다"라는 답이 빈번하게 강조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는 자녀를 가능하면 적게 낳을려는 경향이 대다수의 경우, 혹은 그렇지 않는 경우, 대개는 최다수를 차지한다. 누가 이런 주장에 불쾌감을 느끼게 될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영원히 선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나는 주 여호와 하나님이며, 나 외는 아무도 신이 아니다"라고 일러주셨다. 여호와는 최고의 위치에 계신다. 하나님의 안목에서도 당신이 이삭을 제물로 받으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하는 것 (비교, 1절)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이 아브라함 자신의 미래이자 바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제물은 - 비록 그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문제이다. 마지막에 아브라함이 볼 수 있는 사실이 그를 아주 홀가분하게 하며, 하나님이 그를 보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처럼, 각종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할 수 있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전제는 '아버지와 아들의 통일체'로 보는 고대 시대의 안목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아주 낯설게 생각되며, 이것이 또한 이 사건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게 됩니다. 고대 시대에서는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속 살게 되며, 아들 안에 아버지의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 아들이 아버지의 미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보지 않는 반면에, 현대적 사고방식으로는 아버지와 아들 안에 두가지 상이한 인물을 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고령의 아버지가 단지 혼자만 제물이 된다면, 아들은 물론 자신의 미래가 그대로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바치는 일은 현대적 사고와 거의 가깝게 "아버지 대신에 제물로 바치는 일"이 아니라, 단지 아버지만 제물로 바치는 일, 그 이상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지나친 자기 헌신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온전히 보전치 못하면,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이 어느 정도 온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미래를 철저하게 송두리째로 드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황하시고 제물인 이삭에게 손대는 일을 황급히 중단시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같이는 헌신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 자신만이라도 온전히 주님 전에 드릴수 있기를 다짐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창 22,  1 -19,     요 2,  13 - 22

배경 찬송은 "주님의 사람들"의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되새김질편지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삶 중에 "소알 성"  (0) 2008.04.19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  (0) 2008.04.19
희망과 소망의 무덤  (0) 2008.04.18
짝지를 위한 기도  (0) 2008.04.17
그니가 그미를 찾다  (0) 2008.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