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앞에서
큰 물이 박수하며 산악이 함께 즐거이 노래할찌어다
저가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시 98, 8 - 9)
기쁨과 심판이 어떻게 서로 어울릴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심판이 다르게 결정된다면 그럴 수 있긴하다. 즉 불의를 저지르고 이것을 단지 속죄해야하는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이것은 기쁜 내적 만족에 기여한다. 소위 이것을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악의적인 즐거움"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시편 98편은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의를 위해 배려하심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을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물론 이 사실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무력을 휘두르고 불의한 자들이 승승장구인 반면에, 가난하고 약한 자들은 파멸에 이르고 있다.
신약성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장차 심판자이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심판권을 양도하신 것이다. 하지만 심판은 우리 모두에게 예외없이 해당되는 일이다. 우리는 이 심판이 단지 관대한 심판이기를 기대하고 싶어한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을 충분히 얻지 못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심판을 분명히 의롭게 하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물과 산악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뻐하며 희망하는 것이다.
시편 98편에서 처럼, 하나님의 심판적인 행위에 대한 메시지는 전체 성경에서 항상 기쁜 소식, 즉 복음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애석하게도 항상 이렇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Maranatha! 주여, 어서 오소서!"란 기도로써 예수님의 재림을 온전한 기쁨과 희망의 결과로 해석했으며, 이 위대한 실현의 순간을 고대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중세 암흑시대는 매순간을 공포에 질리는 "분노의 날"로 보았습니다. 그들에게서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사람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보복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젊은 루터에게도 이런 생각은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재발견한 루터를 통해 위협의 복음에서 다시 기쁨의 복음으로 된 것입니다. 중세 종교의 거짓 흉계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낸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어둠을 깨고 우리를 빛으로 인도한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위협의 복음' 속으로 빠져들거나, 끊임없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협의 복음'으로 전하는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이 우리 주위에 항상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기쁨의 복음'을 그대로 깨닫고 고백하는 복된 주일이 되시길 .... 샬~~~롬
배경 찬송은 국립합창단의 454장 찬송 "주 사랑 안에 살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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