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김질편지/누가복음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그리스도의 편지 2008. 9. 28. 23:21

Candle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눅 23,  14)
  
  

     빌라도는 세번이나 군중들이 이성과 권리를 경청하도록 시도하고 있다. 그의 앞에서 잡혀온 죄인은 사형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가 이해시키고자 한 시도는 모든 것이 허사였다. 군중들은 전혀 들을 생각도 하지않고 단지 소리치기만 하면서 광분하는 폭도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썩어빠진 문처럼, 이들 앞에서 빌라도의 저항도 마침내 허물어지게 되었다. 빌라도는 군중들이 스스로 판결을 구술하도록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선동하신 적이 있었던가? 만약에 그렇다면, 명백하게 이스라엘 백성은 서로 자기 자신들에 대적하는 것이 되고만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자신들의 희망을 걸었던 사람에 대한 증오가 이렇게까지 생겨난 것일까?  인간 영혼의 가장 어두운 심연이 열어젖혀진 것이다. 눈먼 증오의 끔찍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현장이다.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

 

     빌라도는 마침내 예수를 넘겨주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 형을 당하실 때, 군중들 가운데서 전혀 동정적인 외침이 없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 앞에서 인간들의 공동체로부터 잔인하게 내팽겨쳐지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빌라도가 말하는 "죄없는 이 사람"의 자격으로 증오의 구렁텅이로 빠져드시고, 이것을 침묵으로 묵묵히 다 감내하셨다.

     오늘날도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셔야만 했을까?"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우리는 완전히 이해하는듯 하면서도 전혀 이해하려 들지도 않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언명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으며, 당신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겨주셨다"는 진실입니다. 이런 명확한 진리를 고백하고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의 신앙고백을 잘못된 길로 선동하고 미혹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올해도 고난주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바로 빌라도의 질문 앞에서 "십자가에 못박으시요! 십자가에 못박으시요!"라고 소리치는 광란적인 군중들과 그 뒤에 알게 모르게 조종하는 이스라엘의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우리가 의로운 일에 개입하고 불의를 따르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주었던 여명이 동터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에 합당한 판단과 이성을 구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눅  23,  13 - 25,   사 26,  20 - 21

 

배경 찬송은 채수련/임임택의 "그토록 사랑하셨나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