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기념 그 이상인 성찬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마 26, 29)
예수님은 최후로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을 기념하는 제자들중에 장차 무엇이 다가올 지에 대해서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큰 위험이 닥칠 것이라는 예감이 모두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무엇인가 끝을 치닫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예수님과 서로간의 공동체적 생활이 내부적으로는 물론 외부적으로도 극도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서로 상호간에 불신이 팽배해졌으며,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다. 거기에다 주님의 이와같은 비밀스런 말씀까지 합세한다. 이별의 아픔이 이 문장에 담겨있으며, 재회의 기쁨, 슬픔과 거의 믿기 어려운 언약도 마찬가지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아직 모든 것이 좋은 결말을 가지게 될 것인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감추인 심오한 뜻은 부활절 이후, 즉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서야 비로소 제자들에게 해명된다. 그리고 나서야 제자들은 이해하게 된다. 특히 그들이 성찬을 행할 때면, 더더욱 그러했다. 최후의 만찬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이 그들 가운데 머물러 계시며, 제자들은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십자가에 처형되시기 전날 밤에 함께 떡과 잔을 나누셨던 최후의 만찬은 성찬식의 가장 중요한 근원이 됨을 모든 그리스도인은 고백합니다. 하지만 초대 기독교인들이 부활절 후에 성찬에 함께 했을 때는 예수님의 최후에 만찬에 대한 기억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전래 풍습과 경험들이 이와 함께 했던 것입니다. 유월절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언약을 맺은 절기에 대한 풍습, 새로운 유월절 양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힌 자의 의미,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공생애적 예수님의 밥상공동체, 부활하신 예수님과 따르는 제자들과의 공동체, 예수님 은혜에 참여하는 감사 등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상이한 내용들이 결국 "성찬이 그리스도 예수의 임재에 대한 기쁜 확신과 예수님께서 오늘 당신의 교회에 오셔서 당신의 공동체를 지키시며 마지막 날까지 동행하실 것"이라는 납득할 수 있는 약속에 일치하고 있습니다. 성찬이 "기념하고 기억하는" 의식인 것은 확실하지만,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일 뿐만이 아니라,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인 것임을 고백합니다.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또한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기쁨을 누리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