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B. Brecht/문학과 문화

청교도적 안목으로 쓴 외설적인 브레히트 전기

그리스도의 편지 2009. 2. 27. 17:57





청교도적 안목으로 쓴 외설적인 브레히트 전기
- John Fuegi,『Brecht & Co.』 (New York 1994)
 
 
 


소위 서평이라 함은

독자들에게 무엇보다도 독서의 충동을

문학 이론가들에게 연구의 욕구를

비평가들에게 비평의 칼날을,

그리고 저자에게는

보다 알찬 내용을 주문하는 데 있다.

또, 아무런 욕구도 없는 자들에게는 

최소한의 눈요기라도 줄 때

그 역할을 다한다.


(KMJ,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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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히트 사후 30여년 동안 그에 관한 수많은 전기들이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새로운 전기가 출간되었다. 지난해 여름에 미국과 영국에서 동시 출간된『브레히트와 친구들 (『Brecht and Company. Sex, Politics,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Drama. New York 1994』) (이하 BC라 약칭함),『The Life and Lies of Bertolt Brecht. London 1994』란 책이 그것이다. Grove Press (New York) 에서 발행된 책 표지 이 책의 저자는「국제 브레히트 학회 (The International Brecht Society)」창립자이며,「The Brecht Yearbook」의 편집인이였고, 메릴랜드 대학 독일, 슬라브, 비교문학과 교수인 John Fuegi이다. 그는 이 책을 1960년대 중반부터 준비했는데, 25년간의 결실이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된 것이다.


 


Grove Press (New York) 에서 발행된 책 표지


    이 책을 대하자마자 제기되는 의문이 있다. '아직도 브레히트의 전기(傳記)를 쓸만한 그 무엇이 있는가? 또 쓰여질 무엇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 가 그것이다. 이 의문의 답에 대한 '적합성 문제'로 Fuegi의 책은 나오자마자 새로운 관심 (»The Times« 1994년 6월 24일, »Die Zeit«,「Vom argen B.B.」von W. Winkler, 1994년 8월 12일)과 조롱의 대상 (Jan Knopf: Sex for text. In: Konkret, Oktober 1994. S. 53-55, Klaus Völker: Ohne Scham, Ohne Charme. In: Theater heute, November 1994. 52-55)이 되고 있다. 


   언론은 원래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에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이 책이 나오자마자 브레히트와는 전혀 관계없는 언론인들은 즉시 출간된 Fuegi의 『브레히트 전기』에 대해 호기심과 긍정적인 관심을 「타임즈 Times」誌나 「디 짜이트 Die Zeit」誌에다 표명했다. 이어서 TV 방송조차 이러한 면을 방영하기에 이르렀다. 1994년 8월 16일 「한국일보」까지도 한 문화부 기자가 타임즈誌 기사를 번역‧요약해서 게재하고 있다.
    이러한 대중매체의 폭력(?) 앞에 정식적으로 학자들이 비판적인 관심을 표명한 것이 브레히트 연구에 전문인들인 크높 J. Knopf 교수나 푈커 K. Völker이다. 이로써 브레히트 전기가 출간과 동시에 물의를 일으켰던 그간의 평가가 브레히트 연구분야의 권위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정리된 셈이다. Fuegi 책의 내용보다 먼저 이 책이 나오기까지 최근 브레히트의 연구경향을 살펴보게 되면, 이러한 속사정을 한층 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독일 통일 이후, 브레히트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먼저 1988년 브레히트 90회 생일을 기념하여 주르캄프 Suhrkamp와 아우프바우 Aufbau 출판사가 공동으로 새전집(GBA) 출판을 기획했다. 이를 계기로 브레히트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가 했는데, 곧 동‧서의 장벽이 무너짐으로써 브레히트 문학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그 중심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소위 "또 다른 브레히트"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국제 브레히트 학회』의 주최하에 『다른 브레히트 Der andere Brecht』란 주제로 1991년 12월 8일에서 13일까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개최된 『브레히트 심포지움』이다.
   이 심포지움 이후로 『국제 브레히트 학회』에서는 계속해서 『Der andere Brecht I, Brecht Yearbook 17, (이하 BY로 약칭함)』(1992), 『Der andere Brecht II, BY 18)』(1993), 『Focus: Margarete Steffin, BY 19』(1994)을 발행했고, 『Brecht: Then and Now, BY 20』(1995)을 편집중에 있다. 이들 『Brecht-Yearbook』에 실린 많은 논문들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브레히트의 "사생활과 여자 문제"에 관한 언급이 많아졌고, 또 그것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분석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의 움직임도 있다. 그것이 소위 『브레히트 쩬트룸 Brecht Zentrum』에 의해서 1992년 편집된 「브레히트 이후 Nach Brecht, Ein Almanach 1992」(Berlin 1992)을 들 수 있다. 어찌했던 이러한 측면에서 이제까지의 연구에서 긍정적인 부분을 부정적으로 비판하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다른 브레히트 찾기 움직임"은 Fuegi가 내놓은 책 「Brecht and Co.」를 기점으로 그 절정을 이루는 것 같다.


    저자 Fuegi는 60년대 중반부터 언젠가는 이러한 책을 내놓겠노라고 장담했다고 한다. 마침내 이 장담은 장장 732 쪽의 분량에다 1800 여개나 되는 어마어마한 각주를 단 그야말로 방대한 『브레히트 전기』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학문적인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나 더군다나 브레히트 연구를 위한 독자들은 이제까지의 수많은 "전기"들에서 기술되지 않은 특별난 새로운 것을 이 방대한 책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펴낸 출판사 "Grove Press"에서는 '10판 정도는 무난히 출판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할 만큼 인기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인기와 호기심, 그리고 물의 뒤에는 정말로 새로운 것들이 물론 있다. 이 "새로운 것"은 Fuegi가 자료로 삼았다는 소위 KGB와 FBI의 자료들이다. 한 인간의 인격을 보호‧존중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자료를 수집한 것으로 보기 어려운, 거대한 비밀경찰 조직에서 수집한 탐색문서 (Schnüffeldokumente)를 이제까지의 연구 결과보다도 Fuegi는 그의 책에서 훨씬 더 신뢰하고 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Fuegi는 그의 책에서 사회주의 작가로 알려진 브레히트를 "개인과 자본의 착취자, 여성 파괴자, 나아가서 거짓말쟁이 작가"로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브레히트를 「사기꾼」, 연인이자 공동작업을 했던 여인들 - 하우프트만, E. Hauptmann, 스테핀 M. Steffin, 베를라우 R. Berlau - 의 정조와 문학적인 재능을 유린하고 도둑질한 「파렴치」로 비판하기 위해서 (Fuegi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의 책 뒷표지에 브레히트와 함께 이들 세 여자들을 나란히 게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를 너무 신뢰한 나머지 브레히트 연구자요, 비교 문학자이자, 대학 교수인 그의 이성적인 판단과 학문적인 소양을 브레히트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독자들이면 누구나가 의심할 정도로 지극히 지엽적이고 독단적인 문제로 이 책은 치우치고 있다.
    심하게 이야기 하자면, 이러한 자신의 논지를 관철하기 위해서 Fuegi는 이제까지의 연구와 객관적인 자료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종종 책의 저자가 객관성과 이성을 잃은, '복수심에 불타는 스테핀 M. Steffin의 동생이 혹시 John Fuegi가 아닌가?' 생각할 정도다. 그야말로 그는 학자로서의 챙피함도 잊고 외설적인 기술들을 나열하기에 온 힘을 소비하고 있다.


스웨덴 망명중 (1939년 여름) Brecht와 Weigel


    그 예를 몇몇 들어보자. 브레히트의 부인 봐이겔 H. Weigel과 스테핀 M. Steffin의 모든 임신 날짜와 낙태날짜의 기록을 일일이 작성해 사립 탐정가와도 같은 의심을 하여, 반증할 아무런 증거도 없으면서 브레히트의 딸 바바라 Barbara의 생모가 봐이겔이 아니라 그녀의 식모였던 홀드 Mari Hold라고 결론을 짓는다. (BC, 138, 252쪽)
    Fuegi는 한발 더 나아가서 독자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브레히트는 섹스광이고, 그러한 섹스의 역할은 그의 계속적인 작품활동의 주무기 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Fuegi는 독자들에게 저속하고 졸렬한 표현도 마다하지 않는다. "스테핀은 폐병환자임에도 불구하고 불쌍하게도 브레히트에게 매일 타이핑은 물론 동침을 강요당했으며 (BC 299쪽), 그녀가 죽은 후에 브레히트가 그녀의 도움으로 번 돈을 가지고 헐리우드에 집 한채를 샀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베를라우 역시 브레히트에게 사기를 당했고 이용당했다'고 Fuegi는 기술하고 있지만, 그녀의 회고록 『브레히트의 라이 투 Brechts Lai-Tu』(Darmstadt 1985)에서 우리는 그러한 면을 전혀 찾지 못한다. 이것 역시 Fuegi 자신의 논조를 강조하기 위해서 자신의 의심을 과장하여 기술하고 있다.


    심지어는 그야말로 증명할 길이 없는 개인의 사적(社的)인 문제까지도 서술하기에 여념이 없다. 즉 '브레히트는 여자와 처음 관계를 가질 때는 물론 나중에도 한번도 콘돔을 사용하지 않았다'를 위시하여 '1933년 파리에 망명온 동료들의 부인들과도 동침했다' 등은 Fuegi가 브레히트의 전기(傳記)를 쓴 것인지, 아니면 『Playboy』誌에다 추문기사를 쓴 것인지 독자에게 의아심을 자아내고 있다.


    물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는 속담이 있듯이, Fuegi가 사용한 KGB나 FBI의 자료에서 그런 내용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책의 계속적인 재판(再版)과 통속적인 독자들에게 의도적으로 흥행을 겨냥한 것이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소위 작가의 전기(傳記)라 함은 한 작가의 인생여정을 바탕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내적 발전과 그의 업적과 관련시켜 서술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전기물은 작가의 사상과 작품세계를 시대정신과 결부시켜서 서술하되, 독자들에게 작품의 이해를 돕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Fuegi는 오로지 청교도적인 근시안을 가지고 도덕적인 분노로 시종일관하다 보니, 그 오랜 시간을 소비한 방대한 분량의 『브레히트 전기』를 서술하면서 전기로서 원래의 목적을 벗어나고 있다.



브레히트와 스테핀 (스웨덴, 1941년 2월)


    긴 망명 생활에다 세계대전이란 악조건 아래 만일 이들 세 여자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극작가 브레히트"를 전후에 접할 수 있었겠는가? 왜 세 여자들은 한결같이 모든 희생을 감내하며, 그것을 승화시켜서 브레히트의 손과 발이 되어 기꺼이 공동작업 (Kollektive Arbeit)을 했을까? 왜 이들은 자신의 작가적인 소질과 자기 이름을 드러내기보다 "브레히트 Bertolt Brecht"란 이름뒤에 있기를 원했을까? 그 참된 뜻을 Fuegi는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브레히트 부인 봐이겔을 위시한 세 여인들의 정치적인 야망과 포부,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승리자로 살아남은 그들의 작가로서의 동지애와 용감성을 서술하는 기회를 Fuegi는 모두 소홀히 하고 있다. 이러한 외설적인 기술들이 브레히트 전기를 위해 25년간 집필한 문학교수의 업적이니 아쉽기가 그지 없다. 물론 Fuegi는 미국 독자들에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간에 브레히트에 관한 상당한 관심을 새로이 불러 일으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대신에 브레히트 연구사에서 Fuegi 자신은 『국제 브레히트 학회』의 "창립자"라는 자기의 명성과 그간의 연구업적에 누를 끼치는 결과에 이르지 않을까? 세 여자중에 브레히트와 연인관계이기 보다는 철저하게 「공동작업」이란 대명제 아래, 거리를 잘 유지했었다고 알려진 하우프트만 E. Hauptmann에게는 특별한 외설적인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Fuegi는 브레히트 작품의 "독창성"시비 문제를 확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독창성 시비 문제가 그리 새로운 문제가 아닌 것은 누구에게나 알려진 사실이다. 이미 1928년 비평가 케어 Afred Kerr가 『서푼짜리 오페라』를 두고 "독창성" 문제를 비판했을 때, 이미 그 때 브레히트는 자기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었다.


    Fuegi는 새삼스럽게 이 문제에 관해서 상세하게 작품의 저작권이 봐일 K. Weill, 하우푸트만 E. Hauptman, 그리고 브레히트에게 몇 퍼센트 정도 속할 것이라는 복잡한 숫자를 나열하면서(BC 196쪽), 이 작품의 대부분은 하우프트만에 의해서 쓰여졌으며 브레히트는 단지 덧붙여 썼을 뿐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BC 195 쪽) 이것 또한 Fuegi가 너무나 이 사실에 집착한 나머지, 브레히트가 직접 변명을 하고 후일에 틈있을 때마다 언급한 "독창성"의 의미를 그는 까막득하게 잊고 있다.
    '남의 작품을 베꼈다, 공동 작업자의 글을 훔쳤다'에 집착하지 말고, 브레히트가 자신을 스스로 '극 쓰는 사람 (Stückeschreiber)'이라 부르며, 어떻게 "독창성" 문제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이 문제는 확실해 진다.



『베를린 앙상블』 탑속의 브레히트


    먼저 『코이너씨의 이야기(Geschichten von Herrn Keuner)』에서 브레히트는 "독창성" 문제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요즘에는 혼자서 위대한 저서들을 써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지요"하고 K씨는 개탄했다. "또 이런 것이 대체로 옳다고 인정받고 있지요. 중국의 철학자 장자(壯子)는 아직 장년기에 10만 단어로 된 책을 썼는데 그중 10분의 9는 인용으로 돼 있었지요. 이런 책들이란 우리의 경우에는 씌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럴만한 기풍이 결여돼 있으니까요. [략]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건 한 자루의 펜과 약간의 종이 뿐이지요! 그리고 아무 도움도 없이, 각자 자기 손으로 구할 수 있는 빈약한 재료를 가지고 제각기 오막살이를 짓는 것입니다. 그들은 혼자서 지을 수 있는 오막살이보다 큰 건물은 전혀 알지 못하지요!" (GBA 18, 441)

    이 글에서 브레히트는 전혀 인용을 하지 않고, 한 작품을 독창성 있게 쓰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오만인가를 지적하고, 또 이러한 오만은 결국 오막살이 정도나 지을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비웃고 있다.


    Fuegi는 1952년 브레히트 협력아래 『베를린 앙상블』이 개작한 몰리에르 『돈 쥬안 Don Juan』을 두고 비난을 하고 있다. 새전집(GBA)의 해설(GBA 9, 417 f.)에 이 작품의 저자에 관해 상세히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하우프트만 과 베손 Benno Besson이 주로 작업했고, 브레히트는 전혀 개작 때에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브레히트 작품처럼 전집에 편집이 되었다"고 Fuegi는 비판하고 있다. (BC 521쪽 이하)
    이에 대해서 브레히트는 Fuegi보다 훨씬 앞서서 이에 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즉 셰익스피어 연극작업을 예로 들어 '저작권'에 관해 1940년 12월 8일자 『작업일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렇게 교양이 없는 사람이 그런 작품을 지었을 리가 없다'는 셰익스피어의 저작권에 관한 시비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다. [략] 멍청한 배우가 현명한 사람의 행위를 따라 그대로 단순히 연기하듯이, 극작가 역시 그가 아무것도 모를지라도 한 작품 속에서 다양한 지식들을 나열할 수가 있다. 극작가는 지식을 꼭 습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단지 의식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략] 공동작업은 항상 동시적인 합작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아주 느슨하게 작업될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공동작업에 있어서 항상 '결정하는 인물'이었을 것이고, 그는 이따금 단순하게 공동 작업자를 가졌을 수도 있고, 또 그가 늘 사용했던 어떤 뛰어난 사람의 지도적인 이념에 도달했을 수도 있다. 나 자신이 스스로 셰익스피어를 극작술의 우두머리로 보려고 하고 있다." (GBA 26, 443 f.)


    브레히트가 함께 공동작업을 했던 세 여자들로부터 모든 작품을 '섹스'란 무기를 앞세워 자기의 것으로 했다는 Fuegi의 주장은 결국 브레히트의 공동작업 (Kollektive Arbeit)을 그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가, 아니면 이에 관한 브레히트의 입장에 관한 이해부족의 소치이다.
    우리는 브레히트가 그들에게 얼마나 각자의 창작활동을 강요했는지 잘 알고 있다. 또 브레히트와 공동작업을 했을 경우에는 항상 그들의 이름이 브레히트의 이름과 함께 나란히 공동 작업자로서 명기되어 있다. 이 공동작업에는 누가 몇 퍼센트를 작업했다고 명기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공동작업을 위의 인용한 글에서와 같이 이해했고, 또 그러한 이해 속에서 공동작업을 했기에 그런 문제는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에 '브레히트'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출판사로부터 많은 돈을 요구하기 위해 브레히트를 저자(著者)로 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Fuegi의 책이 아무리 10판을 거듭해서 출간될지라도, 학문적인 목적에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 외설적 기술들과 이제까지 출판된 『브레히트 전기』의 영어판이라는 것 이외는 특별하게 새로이 연구된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레히트란 인물에 관심과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 봄직도 하다. 왜냐하면, 연극 잡지 『테아트 호이테 Theater heute』誌(1994년 11월)가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올해 간행된 예술인들의 전기 중에서 이 책만큼 관심을 끈 책도 없고, 또 이제까지 독일에서 이 책만큼 강한 거부감을 받은 책도 없다"고 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이 알아서 나쁠 것은 없다. 또 알 것은 알고, 알려져야 할 것은 알려져야 한다. 

    Fuegi는 "브레히트에 관해서 이제까지 충분히 알려진 것보다 아직 알려져야 할 것이 많다. 아주 흉악한 브레히트와 아주 선한 브레히트, 여기에 자신의 『브레히트 전기』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했건 Fuegi는 이 책을 통해서 적어도 다음의 사실로 독자에게 경종(警鐘)을 울리고 있다: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는 자, 남 앞에 서기를 좋아하는 자들이여, 몸가짐은 물론 부부생활까지도 조심해라! Fuegi와 같은 사람은 항상 있다"고 말이다.  (괴팅겐 1994년 겨울에)

 

 

 

배경 음악은 Omar Akram의 "Daytime Dreamer"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