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B. Brecht/문학과 문화

[서평]브레히트 소네트 - 사랑을 위한 사랑(연애)시?

그리스도의 편지 2018. 9. 28. 05:45





브레히트 소네트 - 사랑을 위한 사랑(연애)시?
- 사랑을 사랑한 사랑시집 – 브레히트∙스테핀 시집 “소네트“ (Karlsruhe, Brechtcode 2018)
 
 


브레히트 소네트 완역판 "사랑을 위한 사랑시집" 표지 (독일 칼스루에, 2018년)


     올해 2018년은 독일 고전작가인 브레히트 Bertolt Brecht가 120주년을 맞는 해이다. 그간 국내 번역된 것 이외에 2500여 수 시들 중에서 "브레히트 시 - 777선 번역 프로젝트"를 진행해오던 독일에 소재하는 "마르가레테 스테핀 프로젝트"는 한국 브레히트 학회가 "브레히트 시선" 2권을 펴내면서도 단 한 수의 소네트도 번역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해, 브레히트 소네트 63편과 스테핀 소네트 12편까지 도합 75편을 완역해서 "사랑을 사랑한 사랑시집"이란 표제로 디지털 콘텐츠로서 국내 독자들에게 선 보였다.

 

    이제까지 한국 브레히트 학회 소속 학자들은 물론 브레히트 독자들에게 브레히트 소네트는 '연애시' 내지는 "선정적이거나 외설적 표현이 가득한 시" 내지는 심지어 "연인이 곁에 없을 때 보상하려는 의미로 소네트를 썼다"고까지 브레히트 소네트를 폄하해 알고 있었다. 물론, 이제까지 알려진 '아주 리얼하게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주고받거나 사랑하는 관계를 소네트 형식에 담은' 몇몇 소네트들로 인해 충분히 그렇게 곡해하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 콘텐츠의 전체 소네트 목록만을 보아도, 브레히트가 쓴 소네트의 다양한 주제들에 이런 주장이 무지로 인해 생긴 억지이자 오해이며 편견임을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래 링크를 클릭해 우선적으로 소네트 목록을 확인해 보도록 하면,



브레히트 소네트 미리 맛보기



    우선적으로 "연애시"라는 단순한 주장은 브레히트 소네트 몇편에 해당되는 개념으로는 맞을지 모르지만, 전체 소네트를 보지 않고 내리는 이런 오해는 63편의 소네트 제목들을 통해 브레히트가 소네트를 쓴 의도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개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브레히트 자신이 거의 매 소네트마다 "....에 대해"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으며, 굳이 14줄로 구성된 소네트 내용을 보지 않고 제목만으로도 각 소네트가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지 손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잘 알려진 아우크스부르크 소네트 15번, "상스러운 말의 사용에 대하여"일 것이다. 



아우크스부르크 소네트 15번


     젊은 브레히트는 이미 아우크스부르크 소네트에서 엄격한 소네트 형식을 통해 남녀의 사랑 행위를 시에다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대중 매체를 통해서 자유롭게 구사되고 있고, 특히 익명이 보장되는 사이버상의 글들에서는 이런 상스러운 용어가 훨씬 더 자유분방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스럽고, 비문학 내지 비교양적인' 어휘들은 문학작품에 그대로 표현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독일의 문호인 괴테나 브레히트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과감하게 시에다 표현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괴테나 브레히트가 소네트에 이런 거친 말을 표현하기 이전에, 이런 어휘의 사용은 실제로 학문의 영역에서는 아주 앞서고 있었다. 왜냐하면, 괴테나 브레히트가 남성의 성기를 속어로 "자지 Schwanz"로 제시한 것을 의학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페니스 Penis"라고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괴테 J. W. Goethe의 "관능적인 시들"은 무엇보다도 '욕구의 상징'으로서, '언어의 본질'로서 접근하고 있다. 괴테 작품에서 여성이 언어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에 대해 괴테는 "자기 문학 작품이 사랑의 완성에 대해 확실히 망각해 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괴테는 욕망과 문학 사이에서 '뒤죽박죽이 된 불분명함'과 글과 욕구 사이에 '구별이 없어지는' 자신의 관능적 글들에 대해 스스로 말했다.

    괴테가 1810년에 8행으로 24개의 연으로 구성된 "일기 Das Tagebuch"란 시에서 자기 문학에서 관능적, 연애적인 글에 대해 "각 문학의 방법에서 결국 우리에게 / 도덕을 진지하게 요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 나 또한 아주 선호하는 노선에 있고자 하네. / 운율이 원하는 것을 기꺼이 너희에게 고백하네 / 하지만 세상에서 지상적인 바퀴에다 / 두 개의 훌륭한 지레를 더 가질 수 있지: / 아주 막대한 책임, 끝없이 더 다양한 사랑"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런 괴테와는 달리, 20세기의 괴테로 일컬어지는 브레히트는 오늘 "상스러운 말들의 사용에 대해"란 '아우크스부르크 15번째 소네트'에서 "무절제하고 분수에 맞게 사는 내가 / 상스러운 말로 이렇게 너희에게 내던지는 것을/ 친구여, 이것을 너희에게 환기시키는 것을 허락하세"라고 시작해서 "성행위"에 대해 시어로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독일의 문호 괴테나 브레히트가 소네트 형식을 빌어 남녀의 사랑 행위에서 오가는 은밀한 언어를 굳이 소네트에 표현하려고 노력했던 이유는 '일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개념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두 작가의 노력이라 할 수 있겠다. 한 면만 치우쳐 보면, 브레히트가 자신의 소네트에  '외설적 표현'을 사용한 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본 소네트와 같은 소네트에서의 몇몇 시어들 가지고 브레히트 전 소네트가 '외설적'이거나 '상스러운' 시라는 쓸데없는 소모적 논쟁으로 흘러 괴테나 브레히트의 깊은 뜻을 곡해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소네트 63편의 제목만을 가지고서도 브레히트가 다루고 있는 주제가 너무나도 다양한 얼굴을 가진 사회상과 인간적 삶에 대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창녀들의 삶, 남성들의 자위와 만족, 내적 허무, 모범과 악,  힘든 삶, 아편쟁이, 주정뱅이와 승자, 망명과 망명자 그리고 소위 '문학적 소네트'로 불리는 "연구들"에서 다뤄지는 고전 작품들에 대한 비판적 관점들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다양한 주제들이다.

    이렇게 볼 때, 소네트는 단순히 남녀간 사랑 문제만이 아니라, 소외되고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간상은 물론이고 인간 존재 문제와 선악 문제, 당시 2차 세계대전 중에 전 나라들을 떠돌고 있는 망명 문제까지 다양하게 노래하고 있다. 더 나아가 고전에서 이미 표현되고 잘 알려진 관점을 연구란 소네트들에서 사회∙비판적인 관점에서 다시 쓰고 있다.


베아트리체를 노래한 단테 시집에 대한 비판



    브레히트는 "단테 시집에 대한 소네트"에서 단테가 "실제로 이루지 못한 사랑', 즉 "결코 방아질 해서는 안되는", "단지 주위를 맴돌기만 하고 단지 보기만" 했던 심지어는 "결코 촉촉해지지 않는" 베아트리체를 무작정 아름답게 추모하며 이해하고  찬양까지 하는 것으로 이상화할 것이 아니라, 비판적 관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이 기꺼이 이루고자 한 사랑, 사회적 실천이 가능한 사랑을 소네트에서 과감하고도 솔직하게 그대로 표현하고자 시도한다.

   이런 사랑에 대한 브레히트의 비판적인 관점은 그의 "아홉번째 소네트"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사랑 (Die Liebe)과 떡치기 (Das Lieben)를 구분하고 있고 "사랑을 사랑할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브레히트 소네트에 대해, 스테핀은 "응답 소네트"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아주 리얼하고도 구체적으로, 브레히트도 보다 더 과감하게  자신의 소네트에서 표현하고 있다.



브레히트 "아홉 번째 소네트"에 응답한 스테핀의 소네트



   스테핀은 영육적인 사랑을 통해 "여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서 "자기 Ego를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까지 노래하고 있다. 이처럼 사랑은 찬양할 이상화의 대상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영육간의 체험적 사랑임을 브레히트와 스테핀은 소네트에서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다. 결국 이런 구체적인 스테핀의 사랑은 "나는 사랑을 사랑했지만, 떡치기를 사랑한게 아니었어 Liebe liebte ich, doch nicht das Lieben" (Steffin 204쪽)라고 표현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사랑하는 연인을 통해 창작을 배웠다"는 고백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브레히트가 단테의 이상화된 사랑을 비판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점에서 구체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단순히 "젖고" "오르는" 육체적 쾌감의 영역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한 '여자'가 '여인'으로 태어나고 더 나아가 자신을 더욱 더 사랑하여 사랑을 사랑할 줄 알게 되며 이를 통해 삶에 대한 새로운 열정이나 창작력까지 용솟음친다면, 분명 그 사랑은 곱디곱고, 아름다운 사랑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브레히트의 비판적인 시도는 고전문학 (시와 희곡)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에 대한 비판적 관점도 소네트 작품에만 머무르지 않고, 직접 개작해서 무대에 올리게 된다. 이 작품이 바로 렌츠의 "가정교사"란 작품이다.



렌츠의 시민비극 "가정교사"에 대한 소네트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브레히트의 소네트는 "연인이 곁에 없을 때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쓴 연애시"로서 '외설적'이고도 '상스러운' 언어로 표현된 시가 결코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브레히트 소네트는 인간 사랑을 사랑한 사랑시"이다. 왜냐하면, 브레히트가 소네트의 엄격한 형식을 바탕으로 언어를 통해 표현되어야 할 진실과 실상 그리고 반드시 표현되어져야 할 휴머니즘을 소네트를 통해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레히트 소네트는 외설적이라 비판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 언어가 충분히 리얼하고 정확하며, 사회적 비판은 보다 예리하고도 구체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래서 또한 한글 완역 소네트를 (인간) "사랑을 사랑한 사랑시집"이라는 이름에 적합하다고 하겠다.

  

   이제까지 셰익스피어 번역을 통해 "소네트"는 잘 알려졌지만, 정작 소네트 운율 형식은 번역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고 제멋대로 번역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 콘텐츠는 한국 시문학계에 소네트의 엄격한 운율 형식이 한글 시에도 적용될 수 있을 가능성을 "앞으로 쓰여져야 할 소네트"란 서정시, 참여시, 신앙시 그리고 소네트로 쓰는 시편에 이르기까지 특별 소네트들을 제시하고 있다. 브레히트 전공 학도들은 물론이고 시를 사랑하는 독자들 그리고 스스로 시를 쓰는 모든 이들에게 "브레히트 코드"가 브레히트 120주년 기념으로 내놓는 콘텐츠 "사랑을 사랑한 사랑시집"(관심있는 사람은 사진 위를 클릭하면 바로 구매가능)을 꼭 한번 필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2018년 추석 명절, 독일 검은 숲 언저리에서)


       

    

배경 음악은 Brecht/Weil의 1930년 초연 "서푼짜리 오페라 노래들 - 연가 이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