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B. Brecht/문학과 문화

명절 - 기억 - 추억

그리스도의 편지 2009. 1. 26. 19:32




기억과 망각 
- 문화 사회학적인 면에서 보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은 바쁜 일상생활 가운데서 과거지사는 물론,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그날 그날의 의미를 잊고 살기가 허다하다. 이런 와중에도 한국 사람에게 명절은 그 특수한 의미를 아직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비록 핵가족화 근대화된 사회이지만 아직도 구정과 추석에 몇 일간 연휴를 두고 있으며, 이때가 되면 천만이상의 한국인은 고향으로, 과거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수구초심(首邱初心)이란 말도 있지만 아직도 한국인에게 명절은 고향과 과거를 생각하게 한다. 명절날에 한국인은 부모님, 옛 조상, 소꼽 친구, 어린시절 등의 과거시간으로 회귀함으로 현재 속에서 과거를 만나고, 현재의 자신을 찾는 독특한 의미를 이들 명절은 가지고 있다. 

    우리들 각자 각자에게는 명절에 대한 독특한 기억들이 있으리라 믿는다. 인간이 처하고 있는 "사회 여건과 연관이 없는 기억은 없다"는 할브바흐의 논지와도 같이, 그 기억은 천차만별이라고 사려된다. 한가위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것은 매 한가지인데 그 달을 보고 한 인간이 성장한 주위 환경에 따라 고유의 명절인 한가위는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감상과 기억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일개인의 현재 기억은 사회적인 기억이자 나아가서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연결시키는 문화적인 기억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각 개인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사회, 국가와 민족을 이루고, 각 개인의 경험과 기억들은 작은 모임, 지역이나 국가, 나아가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회의 구성원은 물론,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전 인류의 공동경험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 

    기억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잊혀지게 되고, 또 잊혀지게 되는 기억을 현재의 시점에서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전환시켜 동시대인들과 끝없는 의사소통을 한 후에 미래의 공간과 시간으로 전달되어 진다. 이러한 것이 또한 문화의 특수성이다. 인류의 문화를 보다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문화 형태로 전환을 시키고자 인류의 조상들은 갖은 노력을 다했고, 우리 동시대인들 역시 갖은 몸부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보다 앞서 간 사람은 과거 속의 한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기 위해 그 당시의 사회 문화적인 기억들을 오늘에 전하고자 했으며 그 기억의 산물을 통해 현재의 우리는 과거 속에서 이것을 다시 찾고, 이 바탕 위에서 현재와 미래를 다시 연결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의 문화 사회적인 기억의 연장이며, 현대인들의 사회 문화적인 기억은 다시 하나의 객관화된 문화로서 미래 속에 한 과거 문화로 남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이거나 역사적인 기억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망각 (도표에서 윈쪽)과 기억 (도표에서 오른쪽)의 영역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구체적인 시간을 정점으로 특정한 공간 속에서 인간들에게 공연되어지던가, 이야기되어지던가, 영상 매체를 통해서 상연되던가, 또 연주되던가 하는 등등의 표현 매체를 통해 구체적으로 현재의 시점에서 대화의 장이 이루어질 때 소위 기억들은 구체적으로 객관화된 문화의 형태를 띤다. 이런 객관화된 문화는 소위 우리가 접하는 시, 소설, 수필, 희곡은 물론, 연극, 음악, 영화 나아가서 유적지, 성, 탑 등의 유형 또는 무형의 문화를 들 수 있겠다. 

     이러한 기억은 단순한 "의사소통의 기억 (KG)"과 "문화적 기억 (KUG)"으로 구분되는데, "의사소통의 기억"은 공연이나 구술 등을 통해 현재 시점에 재현될 때 객관화된 문화로서 언제든지 "문화적 기억"으로 전환된다. 이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속성을 갖게 되며, 끝없이 망각의 영역에서 기억의 영역으로 전환하여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공간으로 이어진다. 단지 시·공간이 제한된 영역 안에 살고있는 인간만이 이 기억 공간에서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나 사회의 기억들이 객관화된 문화의 형태로 전환되었을 때, 그것은 미래의 어떠한 시·공간에서라도 다시 앞에서 말한 두 기억 영역 속에 되살아 나게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성경(Bibel)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제반 절기가 이에 속하는 데, 신명기에서 유월절에 대해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신 16:3), 칠칠절에 대해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여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신 16:12)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 외에도 무교절, 오순절, 맥추절, 수장절, 장막절 등 모든 절기가 어떠한 문화적, 역사적인 사건을 담아 기억케 하는 장치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약성경에도 이런 기억이 현재 시점에 구체적으로 연출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엠마오 가는 두 제자 앞에 나타나 아주 완벽하게 연출한 사건이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언약의 피인 "포도주"와 예수님의 몸인 "떡"을 떼어 나누시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명하셨다. 하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어느 제자도, 예수님이 이것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려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된 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 그들과 함께 엠마오까지 동행한 후에 함께 식사하신다. 누가복음은 이때 예수님이 두 제자에게 기억을 재현한 것을 "저희와 함께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가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눅 24:30-31)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예수님은 "내가 부활한 예수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단지 떡을 가지고 축사하셨다. 이때 두 제자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는" 행위를 보고 예수님인 줄 기억했다. 이 행위는 최후의 만찬에 참석했던 제자들에게는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재현되는, 앞에서 언급한 "객관화된 문화"의 한 형태인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 있었던,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지내고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 할 것이라고 말한 예수님을 기억했을 때, 예수님은 이미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여기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는 행위"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기점이 된 것이다. 두 제자는 "그 시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수가 떡을 떼심으로" 부활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음을 다른 제자들, 즉 미래에 사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절기마다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며 기념하는 성찬식을 통해 "나를 기념하라" 하신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함과 동시에 다시 계속 전하는 행위이고 확인인 것이다. 

    개인이나, 사회 구성원, 민족, 인류가 스스로 객관화된 문화로 자신들의 기억을 전환시킴이 없이 망각의 기억 속에 단순히 남게 된다면, 그 기억의 주체인 각 개인의 죽음과 동시에 과거로 끝없이 흐르는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볼 때, 각 인간들의 사회적 동질성을 보존 발전시키기 위하여 인간은 대화의 매체를 통한 기억의 영역에 항상 머물러야 하고, 기억-망각-기억-망각이라는 무한 영역 속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이 기억의 순환이 결국 인류의 문화일 것이고 언제든지 각 사회 구성원들의 필요에 따라 시공을 초월하여 기억으로 되살아나고, 또 다시 현재라는 시점에서 계속 대화된다. (1994년 가을에)

 

 

 

배경 음악은 Tom Barabas의 "Moon Dus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