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요 8, 38)
마침 어떤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의 종교를 보장시켜주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들먹인다. 그들이 뜻하는 바에 의하면, 이 사실에 대해 어느 누구도 논쟁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적인 아브라함의 친자 관계는 유일하게 한 사람 안에서, 즉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아버지에 대해 무엇을 보았는지를 말씀하신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방향 전환할 것을 외친다.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의견차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 가운데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원치 않는 사람은 '종교적' 일 수는 있겠지만, 절대로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다. 이런 사람은 '마귀의 자식'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양자택일의 문제이지, 결코 예수님도 좋고 세상도 좋아서 둘다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나 속한 교파나 교단도 결코 '구원의 배'가 되지 못하며, 오로지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그 때문에 예수님과 동행하는 일만이 유일한 길이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예수님의 말씀은 유효한 것이다.
우리는 혈연적으로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은 아닐지라도,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소위 '독실한 그리스도인'에 속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우리에게 유용하며 하나님도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 내지는 당연히 잘 되어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실패하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우리 삶이 성공하고 모든 일이 다 잘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실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상과 다를 바가 없게 될 위험에 빠집니다. 히브리어 중에 "거룩한"과 "쓸모없는"이란 두개의 뜻을 동시에 지닌 "카도시 kadosch"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거룩함'이 인간의 얄팍한 유용성의 측면에서 잘못 생각되는 경우를 강력히 경종하는 단어임에 틀림없습니다. 유용성 목적으로 인해 거룩한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게 함이 없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요 8, 37 - 45, 약 3, 13 - 18
배경 찬송은 국립합창단의 461장 찬송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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