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고후 12, 14)
그 당시 상권의 중심지였던 고린도에서와 똑같이,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아무런 값어치가 없는 것은, 가치도 별로 없다"라고 여겨진다. 이들이 바울의 설교를 위해 아무 것도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복음이 아무리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 무슨 잘못된 생각이란 말인가!! 선물이 지불하고 구입한 다른 것보다 가치가 별로 없단 말인가? 그런데 우리가 예수 안에서 얻은 새생명일지라도 그것을 결코 값으로 치룰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일까? 예수님이 하늘의 영광을 내버려 두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주님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사실은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바울 역시도 이 사랑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도 이처럼 아무런 사심도 없이 예수님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도대체 전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속한 교회가 커지고 성장하도록 그들을 단지 믿도록 인도하는가? 단지 우리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찾도록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영국 식민지 역사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무명을 원한다"는 악명높은 구절이 있습니다. 17세기에 인도에 와서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영국인들은 영국 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식민지 총독으로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면과 같은 교역 상품에 눈독을 들였던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신앙에 대한 영국인의 말은 면을 저렴하게 얻고자하는 단순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비난으로서 이와같은 구절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처럼, 지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원래의 뜻을 오용했으며 도처에서 불의를 저질렀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제자들에게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유하게 되고자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 세계로 파송하셨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디에 속해 있는지 자문해 봅니다. 교회의 사명이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 삼기 위함에 있는지, 아니면 우리의 가진 것을 구하는지 곰곰하게 생각해 봅니다. 목청을 높이며 은혜와 축복을 이야기하면서, 돈을 외치며 예배당의 부흥을 외치는 사이비들을 분별하여 가릴 줄 아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고후 12, 11 - 18, 히 13, 1 - 9
배경 찬송은 "파송의 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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