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1, 17)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교회를 세우면서 여러 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다른 공동체들은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세례를 받았었다. 바울에게서 세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출발점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에 속하는 증거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인간에게로 향하신 하나님 사랑의 증거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기반이다. 복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끼리 서로 상이하고 다양함에 불구하고 우리가 서로서로 연합하도록 한다. 누가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냐는 실제는 지극히 부차적인 문제이다.
스스로 드러나 보이고자 한 고린도 교인들 중의 몇몇 그룹은 아마 자신들에게 세례를 베푼 "유명한" 사람을 내세워 치장하고 내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은 '세례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과 위임으로 베풀며, 다른 이름으로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서 이 사실을 매일 거듭해 새롭게 믿음생활에 받아들어야만 한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무엇이 형식이며, 무엇이 본질인지'를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영적 성숙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 당시에 고린도 교인들처럼, 이러한 문제는 우리 주위에서도 허다합니다. 많은 교인들은 담임 목사에게서만 주례와 장례의 집례를 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담임목사의 심방과 중보기도를 고집하며 심지어 목회자들까지 이를 즐기며 누리고 있는 현상이 그것입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형식을 제거하고 본질만을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일 것입니다. 담임 목사가 하든지 주일학교 어린이가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고 헌신하고 중보 기도하는 것 자체가 거룩한 기도요, 세례요 봉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적 판단과 가치로 신앙적인 것에 서열을 정하려고 한다면, 직분에 관계없이 영적으로 미성숙함을 스스로 나타내어 보이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주의 도움을 힙입어 영적으로 성숙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고전 1, 10 - 17, 요 14, 1 - 6
배경 찬송은 "예수 귀하신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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