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왕의 네째 아들의 이름, "아도니야"는 그 뜻이 아주 좋고 놀라운 이름이다. 이를 번역하면 "나의 주는 여호와"란 뜻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생각하길, 이름 그대로 필적하게끔 그가 행동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도니야는 전혀 이것과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권세욕과 통치욕심에 따라 행동한다. 이미 어려서부터 그는 버릇없이 자라났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렇게 계속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 아버지인 다윗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바로 이 시점에, "나는 아버지의 후계자가 될거야. 아도니야 왕, 만세!"라면서 자신의 시간이 왔다고 착각한다. 아주 멋져 보인다. 이때 예언자 나단은 자칭 왕이 되고자 하는 왕위 계승자에 대해 듣게 된다. 나단은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에게 '아도니야가 마치 이미 왕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통해 나단은 솔로몬을 위해 다윗이 결정을 내리도록 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나단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아도니야는 나쁜 음모를 계속 꾸민다. 그는 아직도 계속 위로 올라가려고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가며 노력하는 일에 절대로 축복이 깃들지 않는다. 하지만 적합한 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인식한다면, 우리에게 축복이 함께 할 것이다.
오늘 묵상에서처럼, 애석하게도 우리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도 마찬가지로 권세욕은 물론 각양의 인간 욕심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결정권이 단 한사람 즉, 목사, 설교자, 장로 내지는 당회나 제직회에 집중되어 있는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위험에 더 크게 노출되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을 "모든 것이 다 내 지휘권 아래 있어! 내 생각이 옳으며 내가 계획하고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있어!"라면서 경계선을 넘고, 마침내 "성령의 이끌림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시험에 빠지며 실족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공동체의 결정을 "민주주의"나 "신정주의"를 거론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까지 합니다. "아도니야"와 같은 지도자는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을 자기 맘대로 다루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면서 아무런 반대없이 단순히 '경건한 봉사자'로서만 남기를 바랍니다. 결국 공동체를 위한 올바른 의견과 희망사항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무시하게 됩니다. 이런 욕심이 영육간에 한 공동체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이 욕심은 결국 믿는 사람이 숨쉬는 공기를 오염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말씀이 역사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까지 합니다. 믿는 우리가 서있는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역사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선한 싸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 하루가 되시길...... 샬~~~롬
왕상 1, 1 - 27, 눅 6, 43 - 49
배경 찬송은 국립합창단의 147장 찬송 "주 달려 죽은 십자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