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내려와 죽음까지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눅 23, 55)
예수님을 무덤에 모시는 일은 떠들썩하지 않았으며 조용한 가운데 치뤄졌다. 그렇지만 재판광경은 대단한 주목을 끌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한으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한 자로서 십자가형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리마대 출신 요셉이 빌라도에게서 그리스도의 시신을 요구할 만큼 그렇게 용감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을 전혀 장사를 지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실한 갈릴리 여인들이 없었더라면, 아무런 관심도 없이 가운데 아리마대 요셉이 혼자서 예수님을 무덤에 모시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제자들이 예수님과의 연대감을 보인 것이 아니라 바로 여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삶 가운데 그리고 그들 삶을 위하여 예수님이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그들은 또한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같이 지키면서 최후 안식을 위해서도 갖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
여인들은 향품과 향유로써 다음날 방부처리를 하고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고자 한다. 바로 이 자리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무엇이 우리의 크고 참 소망인지'를 보게 된다. 고통, 죽음 그리고 무덤이 최후가 아니라, 죽음 뒤에 오는 기쁨, 부활과 생명으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갖가지 말을 입에 담는 가운데서도, 어떻게 개인적으로 우리 자신이 죽음을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불확실성은 여전히 남게 됩니다. 죽음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내어 우리 자신을 맡기는 신앙의 담대한 결단으로 남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이 순간에 당신 안에서 삶의 기반을 구하도록 요구하십니다. 각종 세상적인 성공, 인정과 확인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삶의 기반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죽음은 우리가 바로 현재의 시간 속에서 영원으로 작용하도록, 매순간 심도있고 의식적인 삶으로의 초청인 것입니다. 또한 죽음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통째로 맡기기 위해, 애착심을 가지고 연연하는 모든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내려놓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셨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희망의 표현이 곧 죽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부활신앙으로 죽음과 부활 사이에 아침을 열어젖히면서 의연한 죽음관을 되새기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눅 23, 50 - 56, 호 5, 15 - 6, 3
배경 찬송은 국립합창단의 158장 찬송 "하늘에 찬송이 들리던 그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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