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가면 무도회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마 21, 32)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했지만, 냉담과 현혹함에 부딪치게 되었던 선지자들의 설교를 기억하게 한다. 문제는 명백한 무신론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회개가 필요없다고 단순히 믿었다. 위험천만한 일은 피상적인 긍정, 두 아들의 비유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단지 겉치레의 경건에 놓여있다. 예수님께서 경건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세리와 창녀들을 판단코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신다. 하지만 이들은 세례요한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처럼, 예수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예수님의 설교가 감명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전권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 이들이 우리보다 "살아 있는 사람 치고 주 앞에 의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시 143, 2)란 성경구절을 더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알았던 것 같다. 경건함은 공공연하게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사역을 보지도 않으며 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다른 무엇으로도 살 수가 없다. 회개하라는 선포가 이미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본래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자 수많은 방법을 동원합니다. 가발, 짙은 선그라스, 짙은 화장 그리고 요즘은 아예 성형수술까지도 합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직접 가면을 쓰지 않은 라이브 가면무도회에 서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겉으로만 웃음을 띄는 "친절"이란 가면을 합니다. 이런 우리는 겉으로는 결코 화내는 일이 없으며, 항상 기꺼이 돕고 선한 일만을 합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가치로 정의한다면, 이것이 바로 가면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면은 어떤 경직됨이 있고 생동감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가면을 벗을 용기를 가지고 실제의 우리를 나타내어 보인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을 그대로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인간관계는 아주 쉽게 가능해 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실된 인간이 바로 신뢰와 믿음을 일깨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종 가면들을 벗어 던지고 우리 자신의 참된 모습으로 이웃들에게 나아갈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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