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위를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슥 1, 4)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배생활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 파괴된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것들이 잘되어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성전은 곧 다시 예배의 장소와 삶의 중심의 되어야만 한다.
때때로 계획이 중단되었을 때, 예언자 학기는 백성들을 다시 일자리로 보내야만 했었다. 이제 다시 일이 잘 되어간다. 일꾼들을 회개로 부르기 위해, 왜 이제 스가랴와 함께 두번째 예언자가 등장할까?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일이 없이도 자신들의 믿음을 가꾸는데 있어서 외적으로 아주 적극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각종 종교적인 활동과 공허한 마음 사이에 놓인 이러한 심연을 잘 알고 있지 않는지?! 또한 우리들이 믿음의 공동체와 세계 속에서 최선의 동기를 가졌을지라도,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거하지 못하면, 우리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다. 진실로 하나님께로 되돌아 선다는 것은 바로 사는 일이다.
에레베스트와 같은 높고 험한 산을 등반하는 사람들은 단지 정상정복만을 목표로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눈사태가 정상으로 가는 길을 불가능한 지점으로 인도했을 때, 등반을 계속하는 일은 바로 확실한 죽음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러할 때, 살아남을 유일한 가능성은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 서는 일일 것입니다.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자신들의 정치적 부패와 과오를 쇄신하기 위해 당 이름은 물론이고 색깔도 적색으로 바꾸고 변화의 모습을 보이는 척했던 "새누리당"은 "새로운 정치의 물결과 야권후보 단일화"라는 눈사태를 맞아 하루가 다르게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갔고 대선을 19일을 남겨두고 바로 이런 "정상을 향한 불가능한 지점"에 당도해 있음을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