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요 18, 27)
군인들이 예수님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했을 때, 바로 전만해도 아직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싸웠다. 그런데 지금 그는 대제사장 집의 안뜰에서 예수님을 제거하고자 체포했던 병사들이 피운 모닥불 옆에서 불을 쬐이며 서 있다. 하지만 예수님을 굴복시키고자 하는 이 곳에서 온기를 얻고자 한다면, 그는 실패했어야만 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렇게 세 번씩이나 베드로가 '예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일이 일어난다. "나는 그가 아닙니다!"는 베드로의 슬프고 슬픈 표현이다. 어떻게 베드로가 그렇게도 한없이 깊이 추락할 수 있을까? 과연 이것이 살아남기 위한 인간적인 두려움이었을까? 이것이 과연 첫번째로 부인하는 논리적 결과였을까?
우리는 무엇이 이렇게 예수님과 거리를 두게했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의 원수들이 피워 둔 모닥불 곁에서 불을 쬐이고 있는 사람이 동시에 예수님의 편을 들 수가 없다'는 모든 사실을 이미 체험했었다. 베드로는 극심한 위험에 처해 있다. 분리와 도주가 이제 순서이다. 오늘날 예수님은 용서해 주시는 두 팔로 껴안아 주시며 우리에게 "너희가 이렇게 다가오니 얼마나 선한 일인가!?"라고 말씀해 주신다.
독일을 여행하면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교회건물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교회 종탑 끝이 십자가이면 천주교이고 종탑 위에 닭모습이 보이면 개신교입니다. 어떻게 교회 종탑 끝에다 닭모양을 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닭은 바로 베드로, 나아가서 인간들의 크고 큰 실패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그가 예수님과 더불어 체험했던 것을 부인했습니다. 어쩌면 이 교회 종탑 아래 모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배신과 부인을 거듭하는 무리들임을 고백해 봅니다. 비겁하고 못난 사람들이 그 곳에 모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도 늘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인하며 비겁한 사람들을 늘 새롭게 용납하시고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종탑 위에 닭이 걸려 있는 교회로 모이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와 더불어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각종 허물과 잘못을 회개하며 다시 시작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 샬~~~롬
요 18, 12 - 27 욥 38, 1 - 11
배경 음악은 "Fernando Ortega"의 "I will sing of my Redeeme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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