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 못한 아쉬운 소통?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요 8, 58 - 59)
아브라함의 위대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더 위대한 것을 생각케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함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지만, 이 역사는 예수님을 향해 달려가며 예수님 안에서 실현되게 된다. 아브라함이 고령의 나이까지 살았지만 죽게 되었다. 예수님은 영원하시며 부활 안에서 죽음을 이기고 극복하셨다. 아브라함은 피조물이지만, 예수님은 창조주의 편에 서 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진짜 하나님이시다.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대화하는 사람들의 흥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행했던 똑같은 실수를 한다. 이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종교적 현상으로 분류하고자 하며, 이것으로써 예수님에게 합당한 인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지 특별히 종교적으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만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이며 동시에 참된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고무되고 있다.
천안함 침물과 함께 병역의무로 국가에 충성하던 46 명의 젊은 생명들이 목숨을 앗기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단 한 명이라도 국민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지켜야 하는 정부당국이 사고 후에 한 명이라도 더 구해내기는커녕 20여 일이 지나도록 침몰원인 조차도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온국민들은 대통령인 이명박 장로가 "추모"라는 아름다운 (?) 언어를 앞세워 "감성적인 눈물"을 보임으로써, "국군통수권자"로서의 막중한 책임을 대신하는 의사소통을 오늘 일방적으로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선하고 올바른 의사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방을 의도적으로 고무하고 선동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에 대한 판단도 미리 내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갈등의 무덤을 파헤치는 대신에 무엇보다도 대화를 풀어갈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대화하는 쌍방이 모두 어느 정도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대화에서 예수님은 잘못할 수 있는 모든 잘못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갈등은 단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소통 가운데서 선한 권리를 가진 것이 이러한 다툼 속에서는 오히려 난처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특별히 경건한 사람이었더라면, 예수님은 기껏해야 우리 삶을 위한 모범으로만 적합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인간들의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독선으로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진리는 전하되 선하고 아름다운 소통을 할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 샬~~~롬
요 8, 46 - 59 롬 11, 1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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