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 11)
오늘 묵상에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당신의 삶의 근원적인 경험으로서 '포도원 비유 (막 12, 1 - 12)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함축된 몇마디 말로써 말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거의 거부만 당하셨다. 심지어 당신의 가족들에게서 조차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당시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아주 쉽게 이렇게 처리하지는 않는지? 오늘날 누가 예수님을 영접하는가? 원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우리는 매년 성탄절을 화려하게 보낸다. 하지만 우리가 어린 시절의 센티멘탈한 기억을 되살려내는 절기 이상으로서 과연 성탄절을 보내고 있는지?
예수님께서는 물론 하나님 가운데 보호하심을 받는, 다른 근원적인 경험도 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거부"라는 사실에만 머물러서는 않된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예수님을 향해 열고서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되는 새로운 가능성이 우리 앞에 열려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환영하는 손님으로서 우리 가운데 초대하는 일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도록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가운데로 들어오기만 하신다면, 예수님은 모든 것을 반드시 관철하실 것이다.
극작가 보헤르트 (Wolfgang Wochert)는 2차 세계대전 후에 "문 밖에서 Draußen vor der Tür"란 희곡을 집필했습니다. 이 작품 속에 베크만은 자기 가족, 자기 소유와 존재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아무도 그가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는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포로수용소로부터 고향집으로 되돌아 오게 되는데, 더 이상 따스하게 그를 맞아드리는 고향집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와 살고 있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이해와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는 오로지 거부의 세계가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보헤르트의 작품에서는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는 고독한 늙은 남자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물론 극작가 보헤르트와는 다르게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인간이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둘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며 고통하며 죽기까지 하시고, 마침내 부활하시면서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변화시켰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어떤 인간도 "문 밖에서" 서 있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문 밖에 서서" 서성이고 있는지요? 지금 당장 "문 안으로", 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기꺼이 들어오는 하루가 되시길 .... 샬~~~롬
요 1, 9 - 13, 요일 4, 11 -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