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에서/순례길에 (사진.글)

쓰다 만 가을 편지

그리스도의 편지 2010. 10. 30. 23:45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매우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놓으시고
 들판 위에 바람을 풀어놓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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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토록 무덥던 여름도 가고 오래 전에 읽은 릴케의 시 한 구절에 가슴아리는 가을이 다가왔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한줄기에 불현듯 시려움마저 느껴질 때, 여름의 열기는 관용의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허무하리만큼 아름다운 가을이 예감된다. 조락한 나뭇잎 하나에도 존재의 허망을 느끼는 가을의 문턱에 한국에서는 삶의 조락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세 아이들과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이른 죽음을 선택한 어느 모정이나 명망 높던 한 기업가의 절망적 투신은 비극적 조락의 정점을 이루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은 하루 평균 36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 선진국이 되었다. 이 수치는 십 년 전에 비해 두 배나 많아 진 것이다. 지난 한 해만도 자살율이 6.3%가 증가했다고 한다. 그 사이 세상 살기가 그렇게도 어려워졌단 말인가? 아니면 삶의 의지가 그렇게 약해진 것일까? 전쟁도 보릿고개도 독재치하도 꿋꿋이 견뎌왔는데 요즘 세월이 어떻다고 그러느냐고 어른들은 혀를 찬다.

 

    그러나 어떤 일반화도 용납되지 않는 개별 죽음에 대해 살아있는 자가 이러쿵저러쿵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기독교 강국인 한국에 자살이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 왠지 아니러니칼하기만 하다. 기독교가 자살을 금하고 있다는 소극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가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서글픔이 일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 종교이지만 종국엔 삶을 가장 긍정하는 것이 또 종교다. 반면 죽음을 가장 리얼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문학이다. 문학적 픽션이 너무 리얼해서 거꾸로 현실 사람들이 그것을 모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회심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자살은 유행을 많이 탄다. 최근에 크게 늘고 있는 투신자살도 전에는 흔치 않던 유행적 현상이라고 한다. 게다가 자살의 유행적 경향은 인터넷이란 초고속 매체를 통해 더욱 부추겨 지고 있다. 매체를 통한 자살의 유행성이나 전염성을 관계 전문가들은 `베르테르 효과 / Werther-Effekt'라고 부른다. 베르테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 아닌가?

 

    1774년 괴테는 24세의 젊은 나이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당시에는 흔치않던 서간체 소설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것은 즉시 질풍과 노도처럼 당시 독서계를 강타한다. 실제로 이 소설은 독일 문학사의 독특한 사조인 `질풍노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등재되고 오늘날까지 고전으로 읽혀진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자살하면서 입었던 노란 조끼와 파란 연미복은 독일뿐 아니라 다른 유럽 나라까지 유행했다고 한다. 베르테르가 이 복장을 하고 죽은 것은 그 전에 로테가 이 옷을 한번 만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가히 로맨스의 최상급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출간 즉시 현실 속의 베르테르를 양산했다. 자살의 권총 소리가 유럽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러면 베르테르는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는가? 그의 자살은 과연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나?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도 베르테르의 자살 뒤에는 로테라는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다. 첫 눈에 반했지만 이미 다른 남자 (알베르트)와 약혼한 여자를 사랑한 베르테르의 고뇌가 죽음으로 이어진 것은 예정된 수순이라는 것이 통상의 이해다. 이게 틀린 독법은 아니지만 전부는 아니다. 엄밀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사랑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상사병은 불치의 병이 아니다. 다만 합병증이 무서울 뿐이다.

    베르테르는 로테에 대한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사랑 대신 다른 자아실현의 수단을 강구한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가 취직을 하고 일에 빠져 보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큰 사회적 모순과 부정에 부딪혀 고향으로 복귀하므로 합병증이 생긴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일 곱 번이나 읽고 전쟁터에까지 들고 갔던 나폴레옹은 이런 식의 말을 한 바 있다. `괴테가 베르테르를 다른 사회적 영역에서는 더없이 성공한 사람으로 설정하고 단지 사랑의 실패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하도록 그렸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하고. 그렇게 되면 소설은 좀더 낭만적으로 되었겠지만 괴테가 그렇게 순진한 사람은 아니다. 인간사의 어떤 중요한 사건도 단일한 원인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은 없다. 소설 제목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에서 추상명사 Leiden(슬픔)을 (엄밀한 의미에서 이 단어를 `슬픔'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굳이 복수로 쓰고 있는 것을 봐도 베르테르의 고뇌가 한 가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베르테르가 죽은 현장을 자세히 보면 그의 죽음이 필연만은 아니었다는 정황도 발견할 수 있다. 주의 깊게 책을 읽은 사람은 기억하겠지만 베르테르의 시체 주변은 딱 두 문장으로 묘사되어 있다.

 

      “Vom Weine hatte er nur ein Glas getrunken.   

      'Emilia Galotti' lag auf dem Pulte aufgeschlagen."

      포도주는 한 잔 밖에 마시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서대 위에는 에밀리아 갈로티가 펼쳐져 있었다.“

 

    독문학자들도 크게 주목하지 않는 이 두 문장에 베르테르의 사인(死因)이 있고, 베르테르의 죽음을 예방할 수도 있었을 단서가 들어 있다. 우선 첫 문장의 주제어 '와인'을 보자. 사랑의 시련이나 삶의 실패를 술로 달래는 것은 최소한 남자들에게는 긴 전통에 해당한다. 83세를 살며 사랑의 우여곡절을 다 겪었던 괴테 자신이 거의 와인을 입에 떼지 않았던 사람이다. “와인은 사람의 가슴을 즐겁게 하나니 즐거움은 모든 미덕의 어머니다” 라고 한 사람이 괴테다. 또 그의 명저 「파우스트」의 도입부는 와인 마시는 장면으로 유명하다. 평생 서재와 실험실에서 고독하게 진리를 탐구하던 파우스트가 끝내 실패하고 절망으로 자살을 시도하다가 부활절 종소리에 미수로 그친다. 그후 메피스토에 이끌려 세상으로 나오는 파우스트는 무엇보다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고 놀라워한다. 이것이 저 유명한 `아우어바흐 지하주점 Auerbacher Keller' 장면이다.

 

    이런 술 (와인)을 사랑의 고뇌에 빠진 베르테르가 가슴에 기별도 안 될 만큼 마시고 두었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가 와인을 마시지 않았기(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단순 논리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 논리의 비약이지만 사려 깊은 괴테가 중요한 문맥에 굳이 “한 잔 밖에”라는 수사법을 쓰고 있는 데에는 지나칠 수 없는 뉘앙스가 깔려 있다. 여기서 와인은 그 자체의 의미 때문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매개하는 중요한 상징적 기제로 의미가 심장하다. 즉, “와인은 한 잔 밖에 마시지 않고 내버려두었다”는 문장은 잔 부딪히며 얼굴 마주할 친구나 이웃 하나 없는 베르테르의 깊은 고독을 암시한다. 그러면 베르테르는 그 동안 뭘 했나? 그는 소설 전체에서 한 번 만나지도 않는 친구 (빌헬름)에게 로테에 대한 자기 감정을 기술하는 데만 전념한다. 이 편지를 친구가 실제로 받았는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선 말이 없다. 결국 베르테르의 편지란, 답답한 마음에 임의로 친구 하나를 만들어 그 이름으로 독백한 거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빌헬름은 최소한 잔 마주치며 아픔을 나눌 수 있는 현실의 친구는 아니었다.

 

    독문학자들중에 베르테르의 자살은 바로 이 답장 없는 편지쓰기에 연유한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일리 있는 생각이다. 즉, 자신의 감정을 누구와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쓰기만 하므로 그 감정에 더욱 매몰되고 종래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통상 우리가 술 한 잔 하자고 할 때, 이것은 대체로 이야기 좀 하자는 말에 다름 아니고 이 이야기란 또 거의 억눌린 감정 털어놓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감정은 털어놓고 나면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이 인식되고 문제 자체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바로 여기에 '마심의 미학`이 있다. 물론 술을 마셔된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 없으며 오히려 망각을 통해 회피할 뿐이라는 반론은 지당하다. 그러나 자살의 40%가 충동적이고 우발적인 동기에서 일어난다는 통계적 사실을 감안한다면 문제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오히려 혼자 생각하며 문제를 부풀린 데서 문제가 된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니까 베르테르가 술잔 부딪히며 누구와 떠들어대기라도 했다면 문제의 탈심각화는 쉽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젊은 날에 실연이라는 것은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니며 누구나 홍역처럼 한 번쯤 겪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살까지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여기에 “와인은 한 잔 밖에 마시지 않고 내버려두었다”는 말의 뉘앙스가 들어있다. 그러나 이것은 베르테르의 태도이고 초점을 베르테르 주변에 있는 우리의 윤리로 옮기면, 우리는 과연 삶의 무게로 힘겨워 하는 베르테르 같은 이웃에게 와인 한 잔 건네며 이야기를 들어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가 하는 반문이 나온다.

 

   이로서 본의 아니게 와인 예찬론자가 되어버린 것 같지만 술을 권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용할 필요도 없이 성경은 술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그럼에도 예외적으로 솔로몬은 「잠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주는 죽게된 자에게 주고 와인은 마음에 근심 있는 자에게 줄지어다. 그러면 곤궁을 잊어버리겠고 다시 그 고뇌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잠 31, 6 - 7) 그러니까 와인이 고뇌를 잊게 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솔로몬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약으로 시선을 옮기면, 예수님의 사역에서 처음 사건이 와인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소위 3년간의 공생애를 가나안의 어떤 결혼식에 참가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포도주를 만들며 '세상 속`으로 깊이 뛰어든다. 삶의 기쁨과 긍정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변증하는 것이 결혼식이거니와 이 자리에 없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 와인이다. 예수님은 흥겨운 가나안 결혼식장에 끝까지 앉아 있었을 뿐 아니라 막판에 술이 떨어지자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흥을 잃지 않게 한다. 그러나 결혼식의 포도주가 단지 현재적 삶의 즐거움만 고취시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가올 삶의 시련과 아픔을 견디고 이기게 하는 일종의 예방주사 같은 역할도 한다. 잘 알듯이 예수님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저녁을 먹는데 여기서 와인 잔을 돌린다. 이 때의 잔을 성배라 하여 많은 문학이나 영화가 소재를 삼고 있지만 주목할 점은 이 술잔을 돌리며 예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고난을 앞두고” (눅 22, 15). 즉, 이 술잔은 다가올 고난을 견디게 하는 상징적 의미의 잔이기도 하다. 그 후 예수님은 실제로 죽음의 잔 앞에서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며 힘들어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음의 시련을 극복한다.

 

    가을은 모든 열정을 무색케 하리만큼 조용하면서도 아름답다. 그러나 가을이라고 해서 우리의 현실 삶이 특별히 더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대립이 때로 우리를 깊은 고독과 우수 속으로 침잠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 아름다운 가을날에 요청되는 미덕은, 혹시 고독과 절망으로 아파하는 이웃이 없는지 살펴보는 일이고 그들에게 와인 한 잔 건네며 위로해 주는 마음이다. 그것이 제 이, 제 삼의 베르테르를 구하는 일이 될 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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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홀로인 사람은 오랫동안 홀로 남아
불면으로 책을 읽기도 하고 긴 편지를 쓰겠지요
그러다가 낙엽이 날리면 가로수 길을
이리 저리 불안하게 헤매 일 것입니다

(릴케 Rilke, 가을날에) 

 

 

2004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