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시 10, 13)
이보다 더 쓰라린 탄식조의 시편이 있을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의심으로 가득하다. 믿는 자는 세상은 이해를 하지만 하나님을 더이상 이해하지 못한다. 믿지않는 이웃, 비웃는 리더, 저주를 퍼붓는 동료들 -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잘되기만 한다. 그들의 자존심은 꺽어지지 않았으며, 그들의 비양심적 가책에 대한 자의식을 굽히기는 커녕 더 높이 세운다.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6절)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허락을 하시는지? 개입하실 수 없으시다면, 자신이 도대체 하나님을 위해 어떠한 존재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신다면, 어디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지? 시편 기자의 마음이 산산히 찢겨지며,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12절)라고 마침내 간청하게 된다.
하지만 악인이 승승장구하며 하나님께서 침묵으로 모든 것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시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 시편기자는 십자가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소리치신 예수님의 외침에 대해서 아직 아무 것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또한 허락하셨다. 하지만 마귀 권세는 그리 오랫동안 승리를 만끽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죽은 자가운데서 깨워 일으키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어느 누구를 잊어버린 적이 있었느냐?"라고 질문하신다.
지난 한주간 동안 원인도 모르게 내내 울적한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음침한 5월 날씨를 빌미로 삼기엔 너무나 울적한 한 주간이었습니다. 이런 한주간을 마무리하면서 다윗의 탄식과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 너의 탄식으로부터 너를 마침내 깨워 일으킬 것이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너의 불안한 질문은 바람처럼 사라질 것이다. 너의 한계가 곧 나에게로 나아오는 길로 향하는 다리였다는 것을 마침내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단지 한가지 사실, 늘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이 선했다는 감사의 확신만이 남게 될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초대에 기꺼이 나아가 십자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복된 어버이 주일이 되시길...... 샬~~~롬
시 10, 막 12, 1 - 12, 롬 5, 1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