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눅 22, 48)
유다는 제자들 중에 한사람으로 예수님 아주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는 신호를 준다. 입맞춤이 그 신호였던 것이다. 원래 입맞춤은 우정, 사랑과 인간적으로 친근함에 대한 표시이다. 바로 여기서 입맞춤이 배신의 표시로 정반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것은 예수님이 바로 이 순간에 시험에 괴로워 하시는 모든 것들을 능가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다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두운 어떤 가능성들을 내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들의 어두운 가능성들이 실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것을 계속 유지하고 있거나 잠재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이름을 부르시면서 다시 한번 말을 건네신다. 이것은 마치 친구를 되얻기 위한 마지막 구애와 같기도 하다. "유다야, 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지 않겠니?"라는 말은 마치 계속적인 관계 유지를 위한 예수님의 최후의 배려와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자신의 길을 간다. 하지만, 이 어두운 사건 한복판에서도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서광이 비췬다. 결코 노하지 않는 사랑이 다시 한번 당신의 생명을 폐하려는 유다를 향해 손을 내어 뻗치신 것이다.
한때 로마 교황청에서 유다를 복권하고 예수님을 배반한 책임에서 벗어나도록 하자는 움직임 있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유다의 태도가 하나님 섭리의 일부분이다'는 것이 었습니다. 하지만 유다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도록 맡겨야 하며, 우리는 단지 유다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본훼퍼 Bonhoeffer 목사는 "그리스도교가 한번도 자부심이나 오만감으로 유다를 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크나 큰 죄악에 대한 인식과 떨림으로 '오 불쌍한 유다여,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단 말인가!'라고 노래를 불렀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유다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죄성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를 통해서 우리 자신들의 마음 속에 악한 죄성을 깊이 이해하며, 우리가 늘 거듭해서 빠질 수 있는 배신에만 머물지 않도록 하나나님께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유다를 바라보는 우리의 깨어있는 시선은 영적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줄 것임을 고백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가 다시 주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기를 서로 더불어 간구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