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에서/순례길에 (사진.글)

우리는 예수를 누구로 알고 있나?

그리스도의 편지 2015. 7. 16. 16:31

Candle




우리는 예수를 누구로 알고 있나?
Klaus Berger:『Wer war Jesus wirklich?』 (Stuttgart 1995)
 
 
 

 

 

    세기 변환기를 맞아 말세론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는 시기에 독일 독서계에 “과연 예수는 누구였는가?”란 의문을 책 표제로 두 권의 책이 새로 나왔다. 

    하나는 시카고 대학 성서학 교수인 John Dominic Crossan이 “교회는 용서받을 수 없는 그 어떤 짓을 했을 뿐 아니라, 예수를 지루한 인물로 전락시켰다”라는 명제 아래 내놓은『역사 상의 예수 Der historische Jesus』(München 1994)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약학을 강의하고 있고 쿰란 연구로 유명한 Klaus Berger 교수가 2,000 년간 정립된 예수상에 대해 전적으로 의의를 제기하며 실제 예수를 찾아나선『예수는 과연 누구였나? Wer war Jesus wirklich?』 (Stuttgart 1995) 란 책이 그것이다. 두 책이 모두 예수의 시대로 거슬러가서 “그가 누구였는가?”를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과학문명과 물질문명이 지배하는 오늘의 관점에서 예수를 고백하며 이해하고 믿고있는 현대인들에게 “적그리스도적 영”에게 지배당할 위험성을 경고하며, “참 예수상” 확립을 역설하고 있다.



    매년 똑같이 연례 행사처럼 맞는 아기예수가 성육신으로 세상에 온 성탄절을 맞는 현대인들에게 이 두 권의 책이 던지는 의문은 예수쟁이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흥미로운 질문임에 틀림없다. 어쩜 매년 치르는 연례 행사와도 같이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믿고 또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역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상태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실은 2 천 년전 아기예수가 베들레헴에 태어날 때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는 교인들이 모인 성전 밖인 지저분한 마굿간 짐승 먹이통에 태어났고, 갓 태어난 예수를 경배하러 온 사람은 “성경을 잘 안다는 믿음이 확실한 교회안 사람”이 아니라 동방박사 세사람과 양치는 목동이라는 것 하나로도 잘 입증된다. 이것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하나의 전형이고, 이러한 실상은 지금도 그리 다를 바 없다고 본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하고 외치는 훈훈한 예배당 안이 아닌 문 밖에 서서 아기예수는 여전히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 2천 번째나 맞는 아기예수의 생일을 맞는 모든 사람에게 “예수는 누구였고, 현재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들 책은 모든 현대인들에게 각자 자신들이 가진 예수상을 다시 한번 점검하게 하는 책이 아닌가 한다.
    성경과 사서(史書)들은 예수를 누구로 기록하고 있을까? 우리 인간들은 성육신한 예수를 과연 누구로 알고 있나? 그리고 예수쟁이라고 자칭하는 자는 예수를 누구로 고백하고 있나? 이들 책은 성경 4 복음서는 물론 사해 (死海) 근처 쿰란 (Qumran) 동굴에서 발견된 두루마리에 기록하고 있는 예수를 구체적으로 독자들에게 쉽고 확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예수 이후 2,000 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사실과 거리가 먼, 또 다른 하나의 “예수”를 혹시나 알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지? 이 성탄절에 과연 우리는 동방박사나 목동이 경배했던 그 아기예수의 탄생을 경배하며 기뻐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에덴동산 ‘선악과’ 사건 이후 죄에 속했던 인간의 죄문제 해결을 위해 구약시대 성전 안에서만 제사장, 예언자, 선지자들을 통해 친히 계시하시던 하나님이 구체적이고 적극적이며 완전한 해결을 위해 친히 육신으로 세상에 온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적고 있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가「다 이루었다」라며 숨을 거두었고 성전에 있는 휘장을 위 아래로 찢으심으로 예수는「모든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공평하고도 직접적인 대화를 가능케 했고, 또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여 다시 성령으로 친히「모든 인간」에게 강림함으로써 성전을 헐고 삼 일만에「모든 인간」의 각 개체 속에 교회를 지은 것이다. 이것으로 모든 인간의 심령 안에 꼭같이 성령이 내재하고 있다. 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예수 재림까지 인간과의 관계를 잠정적으로 에덴동산에서처럼 회복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아담과 친히 대화하신 하나님처럼, “하나님이 친히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성전이 따로 필요치 않다. 이는 하나님과 예수 스스로가 성전이기 때문이라”고 예수 재림후 세계를 확실히 계시하고 있다.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쟁이”를 굳이 정의한다면 예수가 부활을 통해 삼일 만에 친히 일으킨 교회가 심령 속에 살아 활동하고 이 성령의 도움으로 끝없이 하나님과 대화를 통해 성령의 운동을 외부로 나타내며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세상에 계속 전하는 신령한 대제사장이라면, “비예수쟁이”는 이 교회가 심령에는 살아있지만 인간이 자유의지로 그 활동을 제약시켜 대제사장직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을 말함이다. 예수쟁이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 안에 이미 있는 성령을 고백하고, 예수를 시인하고 믿기만 하면 누구나 이것을 누릴 수 있는 쉽고도 어려운 선택의 길을 인간에게 열어놓은 것이다.


    우리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간에 인간을 창조했고, 또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이 예수의 부활사건을 통해 성령으로 친히 찾아와 모든 인간 개체 속에 살아 지금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신약성서에는 구체적으로 교회를 오늘날 흔히 말하는 “영락교회, 순복음교회, 장로교, 감리교”니 하는 “예배당”*을 교회로 정의한 것이라기 보다, 성령이 각 개체 안에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각 인간을 교회로 보고 있다. 소위 “예배당”은 이런 교회가 함께 자리한 유형적인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쟁이는 누구와 무엇을 교회로 믿고 있고, 또 고백하고 있는가? 수많은 교파, 수많은 예배당, ... 이런 현재의 현상은 결국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라는 지상명령을 유형적인 예배당 개념으로 잘못 이해를 한 나머지 예수가 함께하지 않는 유형적인 건물과 모임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주력하고 있지는 않는지? 소위 “성전”으로 일컬어지는 유형적인 예배당을 계속 중요시하고 주장하면 예수의 부활 사건 자체를 무효화할 뿐 아니라 성육신하여 인간 자신과 친히 함께하신 예수를 부정하고, 구약시대에 선지나나 제사장만을 통해 대화했던 하나님을 그 곳에서 찾고, 예수의 자리에다 예배당 조직을 앉히게 되기쉽다. 왜냐하면 하나님, 예수 그리고 성령은 건물인 성전에 더 이상 머물고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성전인 각 인간의 심령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성탄, 십자가 상의 죽음, 부활과 성령강림의 참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 부활사건 이전의 성전을 통해 교회를 이해하거나 예배당을 자기 신앙으로 고백한다면 예수를 고백하는 “예수쟁이”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일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가시적인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다. 분명 요한은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라. 오리라 한 말을 너회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고 적고 있다. 요한의 주장은 과거나 현재, 미래에도 다 적용되는 주장이다. 수 천년간 선지자들이 예수의 성육신을 기다리고 예언했지만 믿지 않았고 선택받은 민족이였고 누구보다 확실하게 믿었던 이스라엘 민족과 예배당이 예수를 십자가에다 못박은 것이다. 이와 동일한 사건들을 우리는 지금도 매일 일상생활에서 매주 예배당 생활에서 반복하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 보아야 한다.


1994년 Beck 출판사가 번역․출간해낸 630 쪽의 방대한 Crossan 교수의 책 


    크게 6부로 구성된 Berger 교수의 책은 이제껏 의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예수를 책의 서두에 구체적으로 답하고 있으며, 세례 요한과의 관계, 목자, 미친 예수, 천국 등의 문제로 성육신한 인간 예수를 2부에서 설명하고 있다. 3부에서 “신으로서 예수”란 제목으로 예수의 신성을 여러 측면에 걸쳐 쉽고도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다. 4부에는 4복음서 밖의 예수를 원전의 문제, 예수와 여자문제, 예수의 인간성 문제 등의 의문을 하나하나 풀이하여 불신앙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현대 예배당의 실상을 지적하고 있다. 5장에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 장사지냄 그리고 부활까지 이르는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를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6장에 예수는 누구였는지? 무엇이 진리인지 짧고도 확실하게 밝히고 있다.
    예수쟁이든 아니든 인간은 과연 “예수”를 누구라 믿고, 또 무엇이 진리라 믿고 고백하고 있을까? 모든 인간에게 임재하고 있는 “임마누엘 예수”가 누구일까?란 의문 속에 인간은 2,000 년을 살아 왔고 또 그렇게 계속 살아갈 것이다. 이 의문을 지금 당장 자기 심중에 던지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 볼 만한 책이다.


    자기 앞에 죄인으로 선 예수를 향해 “무엇이 진리인가?”라고 질문한 빌라도처럼, 지금도 이 문제에 답을 얻기 위해 현대인들은 바람 앞에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다. 여기엔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고 본다. 예수쟁이건 아니건, 목사건 평신도이건, 그야말로 ‘도토리 키제는 격’이다. 인간은 예수를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제나름대로의 진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래서 세상엔 아직 화평이 없고, 싸움만 있다.


    이런 인간에게 예수는 분명하게 “내가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다”라고 단정적으로 밝힌 바 있다. 이것은 어떤 이론과 토론, 설교를 통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부활사건을 통해 우리 속에 내재하고 있는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인” 그를 전적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뿐이다. 요한은 더욱더 쉽게 설명하고 있다. 수 천년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지라도, 예수가 인간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한 그 명령을 믿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어 진다”고 적고 있다.


    진리는 예수가 3 년동안 이스라엘 광야와 마을을 다니며 실제적으로 보여준 인간과의 삶의 관계이지, 어떤 납득되고 설명되어질 이론도 글도 설교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면서도 자기 육신의 죽음을 통해서만 인간을 사랑한다는 진리를 확인시킨 것이다. 이것 외에는 예수가 인간에게 진리를 보여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죽음, 부활, 성령의 강림은 하나님과 예수가 지극히 인간을 사랑해 이 사건을 통해 성령으로 모든 인간의 심령에 직접 임재하는 임마누엘로 나타난 것이다. 예수를 고백하기만 하면 그 큰 사랑 안에 거하고 생명의 길로 이르는 은혜를 선물했고, 이를 믿는 모든 이에게 대제사장직을 맡긴 것이다. 여기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원칙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듯, 친히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똑같이 영원히 사랑하고 있고 그 은혜를 베풀고 있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런데 많은 예수쟁이와 예배당은 자기 예배당, 자기 종파, 심지어는 자기 예수를 믿어야만 천당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이비 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특수현상이 아니라, 대부분 예배당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적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 예수 그리고 성령이 함께한 살아있는 신령한 대제사장들을 다른 길로 인도 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하고, 또 잘못 인도하고 있는 예배당 내부에 활동하는 “적그리스도” 형상이다.
    Berger 교수는 마지막 장에 결론을 지으면서 “진리는 단지 삶의 상호 연관 속에 찾을 수 있고, 이 모든 상호 연관처럼 생동성과 진실성은 미래로 향하여 끝없이 던져지는 질문이다. 그래서 메시야는 생존의지를 가진 삶의 공동체를 위한 하나의 접합체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즉 예수가 열 두 제자와의 관계에서 모범으로 보여준 것처럼, 성령이 심령 안에 살아 움직이며 弟子道 안에 함께 삶을 영위하는 예수로 결합된 공동체가 오늘 우리 중에 있을 때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세상으로 가서 전하라”했지, “예배당을 만들고 그 안에 모여 적그리스도영을 붙잡고 세상을 등지라”하지 않았다.


   삶의 공동체인 교회가 이 사실을 잊고 예배당을 그냥 존속시키기에만 열중한다면,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론과 신학으로 무장한 사이비 종교 단체와 다를 바 없다. 그야말로 오십보 백보인 셈이다. 핑계없고 재주없어 사이비 단체가 되지 못하지, 어느 순간에 사이비 종교가 될 소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는 것이 예배당이다. 이것이 현대 교회 (예배당)의 모순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배당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그러기에 세상과 다를 바 없고, 예배당 안에서도 세상과 똑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당장 잘못된 문제는 하나님 (예수)이 머리되신 교회니까 하나님이 알아 하신다.” 심지어는 “예배당 목사나 집사님 (?)들이 예수쟁이답지 않다해도 하나님의 기름부은(택한) 종이니까 하나님 소관이지 내 소관이 아니다”라면서 예수의 피로 선물받은 대제사장직을 “적그리스도영”에게 쉽게 내맡기고 잘못 인도받고자 자청한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원어가 뜻하듯 “메시야”뿐이며, 적그리스도영이 지배하는 세상에 “적그리스도영”이 세력을 미치지 못하는 곳이 바로 “임마누엘”이 함께하는 교회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것 말고 사족을 다는 것은 스스로 “적그리스도영”으로 자처하는 것이다.


    스스로 예수쟁이라고 자부하는 우리는 자신에게 한번쯤 진실되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성경 일점일획도 틀리는 것이 없다”고 고백하는 우리는 이것을 전혀 믿지 않는 이웃에게도 성령이 사역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가? 그들 안에 있는 성령이 활동할 수 있도록 믿음의 공동체는 무엇하고 있나? 공동체로 모이는 예배당의 움직임이 그들 심령에 성령이 살아 활동케 하는데 방해되고 있지 않는지? 예배당은 “비예수쟁이”안에 고생하는 성령의 사역을 도우기 위한 모임인가? 목사는 왜 필요한가? 단순히 예배당 만을 위함인가 아니면 이러한 사업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함인가? 목사와 제직들은 신령한 대제사장들로부터 잠시 위임받은 자리를 예수를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예배당은 “예수쟁이”든 “비예수쟁이”든 이웃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나? 성령이 심령 안에 살아 움직이는 교인들이 모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감당치는 못해도 어떤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우리는 누구를 “잃은 양”으로 보는가? “자기 예배당” 예배에 안 나오는 사람인가? 아니면 성령이 자신 속에 살아 있지만 그것을 모르고 성령의 활동을 억제하는 사람인가? 내 심령에, 내 신앙생활에 “적그리스도”적인 요소는 과연 없는가?


    이 질문에 모두가 나름대로 훌륭한 답을 가지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오늘도 아기 예수는 영접받지 못하고 우리 마음 밖 예배당 밖에 있고, 1960 여년 전에 부활․승천한 예수재림은 계속 연기되고 있다. 십자가 형까지 당하며 인간을 끝까지 사랑한 예수는 모든 인간이 자신을 인정하고 메시야로 영접할 때까지 절대 인간을 심판코자 재림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천당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하늘을 쳐다보지 말고 성령이 어떤 심령 안에 활동하지 못하고 있는지 주위 사방을 둘러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예수쟁이가 될 때라야, 우리가 `다함께 더불어 예수의 이름으로` 천당갈 수 있다. 현대 그리스도인이 아직까지 방주에 탄 노아네 가족처럼 혼자만 달랑 천국가기 원한다면, 그 자체가 “적그리스도의 영”을 자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자 “부활한 예수”를 깡그리채 부정하는 것이리라.


    내가 진정 예수쟁이냐, 내가 섬기는 예배당이 예수쟁이들이 모인 교회인가?란 질문을 우리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성령을 자신 안에 가진 신령한 대제사장들이 모인 예배당은 이것과 버금가는 삶의 공동체일 때라야 예수가 머리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죽음과 삶 사이에는 반죽음이 없듯, 반쪽 예수쟁이는 있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차차 나아진다”라는 적그리스도적인 주장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예배당의 최대 목표는 예배만을 위한 단순한 “예배 친목계 모임”을 뛰어넘어 소위 “비예수쟁이”들을 변화시켜 그들 자신 안에도 성령이 살아 있음을 믿고,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를 믿고 시인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런 성령의 사역이 땅에 충만할 때까지 예수재림은 끝없이 연기될 것이다. 재림은 비예수쟁이들 때문에 연기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쟁이들이 주어진 사명을 망각하고 있기때문에 연기된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한다. 이 사실에 교회의 존재목적과 사명을 두어야 한다. 예수가 선한 목자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양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단지 하나 뿐”이라고 했듯, 어느 종파나 예배당이든 다니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성경에 증거된 예수, 동방박사와 목동에게 경배받은 그 예수만을 믿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 심령에 꼭같이 살아있는 성령을 인정하고, 각자가 자신에게 맡겨진 신령한 대제사장직을 예수의 이름으로 충실히 수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과연 예수는 누구였고 누구인가?”라는 수세기 동안 던져진 의문을 아직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4 복음서와 소개한 신간을 꼭 한번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예수쟁이건 비예수쟁이건 “말세라 떠드는 미친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서라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꼭 필요하다. 우리가 진짜 예수를 믿고 있는지, “적그리스도영”을 예수라고 쫓고 있는지 항상 확인하며 성령의 도움으로 바로 서야 한다. 더 이상 자신의 대제사장직을 “적그리스도영”에 팔아 넘기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듣고만 “은혜받았노라! 예배당 분위기 좋다!”하기 전에, 몸소 체험하고 인지하는 “예수 바로 고백하기, 믿기”는 당연 첫번째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산 위에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그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많이 행하지 않았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외친 “인간 예수”를 생각하며 ... (1995년 성탄 아침)

  

   

배경 음악은 Chopin의 "Complete Nocturnes"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