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요이 1, 9)
사람들 사이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 물론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이러한 의견차는 이미 초대 교회에도 있었다. 서로 쌍방간의 사랑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와는 반대로 요한이서는 "그리스도의 교훈" (9절)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이 세상에 오셨다" (7절)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즉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진실로 실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우리가 의지해야 하며 근거를 둬야 할 결정적인 진실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충분한지 아니면 또 다른 것을 꿈꾸고 있는가?
그 당시에 신비적 직관을 신봉하던 그노시스파들은 '충분히 아는 사람은 이미 완전한 사람이다'라고 주장했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더 발전되어 좋아지면, 우리 또한 다르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이 그렇게 달라질 수도 있다면,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돌아가셨단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행 4, 12)는 사실을 절대로 잘못 평가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항상 거듭해서 예수님의 긍휼 안으로 나아가는 일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묵상말씀에 핵심이 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교훈"보다, 세상의 삶에서 무엇을 더 중요시 하는지 자문해 보게 됩니다. 믿는 우리가 더 중요시 하는 것이 예수님보다는 학식, 명예나 부유함 등등 세상에서 좋아보이는 수많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얻고도, 예수님을 잊고 살기에 불행해진 수많은 예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만으로 족하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는 삶이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자세라고 고백해 봅니다. 우리의 삶이 과연 예수만으로 충분히 삶인지를 점검해 보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배경 찬송은 국립합창단의 102장 찬송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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