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편지/사무엘상
아우성치는 대신에 기도를
그리스도의 편지
2011. 3. 22. 00:00
아우성치는 대신에 기도를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삼상 4, 5)
환성은 귀가 먹먹해질 만큼 요란했었다. 이 환호 소리는 블레셋 사람들 귀에도 물론 울렸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더 부추긴다. 환성이 땅을 울리게 하지만, 하늘이 귀기울이게 하지는 못했었다. 그것은 희망의 환성이 아니라, 바로 두려움에 대한 외침이었던 것이다. 극도의 위기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로에 있는 성막으로부터 여호와의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왔었다. 언약궤는 여호와 하나님 임재에 대한 눈에 확연하게 드러나 보이는 상징이었다. 언약궤가 성막을 떠나와 전쟁을 거룩하게 해야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전쟁을 결코 거룩하게 하지 않으셨다. 뼈아픈 패전이 그 결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시편말씀을 주제로 가져오신 것처럼 (마 21, 16), 우리는 전쟁의 함성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만 한다. 루터의 번역에 의하면, 이것을 통해 예수님을 위한 기쁜 소리, 즉 "찬미"가 될 것이다. 이 음성이 우리 자신과 세계를 구원할 수 있게 된다.
사회민주당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라우 Jahannes Rau 독일 전 대통령은 난리법석으로 소란을 피운 회의를 마친 뒤에 언쟁의 이유에 대해 질문하는 취재기자들에게, 짧게 "사도행전 19장 32절과 비교하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기자들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외쳐 어떤 이는 이런 말을, 어떤 이는 저런 말을 하니 모인 무리가 분란하여 태반이나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하더라" (행 19, 32)란 성경구절을 찾아 직접 읽어 보았습니다. 쓸데없이 소리치는 수많은 소음들은 정치는 물론이고 교회나 사회 속에 모이는 수많은 회의들을 고통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계획하고 기도 중에 준비하며 함께 심사숙고하는 가운데 시작하면, 이런 소란과 위험이 줄어질 수 있습니다. 비록 형식과 제의처럼 보이지만, 영감의 샘과 공정한 공동체로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용히 드리는 기도가 소란한 외침보다는 지속적으로 효과있게 나타나기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대한민국에도 라우와 같은 현명한 장로 대통령이 있도록, 그리고 각종 의견 수렴을 위해 모이는 처소에서 서로를 중히 여기며 화평하게 발전이 되도록 중보기도로 보태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 샬~~~롬
삼상 4, 1 - 11 슥 7, 1 - 13
배경 찬송은 박형근의 "나의 기도는 이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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